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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기자 Apr 13. 2018

누나들이 연하남에 빠지는 몇가지 이유

  나보다 여덟살 연하인 그는 단 한번도 나를 '누나'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가 부르는 호칭은 언제나 '너'였다. 말이 관계를 규정한다고 했던가. 어리게만 보였던 그가 처음에 '너'라고 불렀을 때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동시에 묘하게 가슴이 떨려왔다. 그가 너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마법처럼 남녀 사이로 변했다. 지금 생각보면 나이만 먹었지 쑥맥이던 나에 비해 그는 연애 고수였던 듯 싶다.


  우리는 외국에서 처음 만났고 첫눈에 이끌림을 느꼈다. 서울에 와서도 우리의 만남은 계속됐다. 그동안 나이 많은 남자들의 '밀당'과 '스캔'에 지친 나는 애교도 많고 저돌적인 그의 사랑 표현에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전화 너머 그가 사랑을 속삭일 때는 기분이 짜릿했다. 거의 죽어가던 사망 직전의 연애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는 길거리에서도, 지하철에서도 과감한 애정 표현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의 손을 오래 잡을 용기가 없었다. 주변에 연상연하 커플이 많았지만 막상 나의 이야기가 되고 나니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회에서 주입한 고정 관념들을 깨뜨리기가 쉽지 않았다. 주변의 우려섞인 시각도 있었고 몇가지 부담스러운 상황들이 펼쳐지면서 나는 그의 손을 놓고 말았다.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네살 연하의 친구 동생 서준희(정해인)의 손을 먼저 잡은 윤진아(손예진)는 그래도 상당히 용기가 있는 편이다. 아무리 그를 다른 여자에게 금방 뺏길 것 같은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당한 자기 확신과 용기가 없으면 하기 힘든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런 윤진아를 보면서 나 역시 그때 그의 손을 놓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한동안 "사람들은 연하남이랑 사귀면 능력녀라는데 네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도발까지 했지만 한번 도망간 마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보면서 가슴 한켠에 숨겨뒀던 연하남과의 추억이 새록새록 생겨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연상연하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는 많았지만, 상당히 서사적이고 직접적인 이 드라마의 제목을 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우리는 그동안 '밥 잘 사주는 오빠'들에만 익숙했지 '밥 사주는 누나'들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물론 아주 가끔은 매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자들이 돈을 써야한다는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대학때도 '밥 잘 사주는 복학생 오빠'들은 늘 어린 여자 후배들을 몰고 다니며 어장을 관리하곤 했다.

 

 여기서 말하는 '밥'은 단순한 끼니라기 보다는 '관계' 또는 '시간'을 의미한다. 드라마에서 준희가 진아에게 '누나, 나 내일도 밥 사줄 수 있나'하는 것은 '내일도 만날 수 있나'는 말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밥이나 한끼 하지 뭐', '조만간 만나서 밥한번 먹자'라는 말도 당신과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는 말의 또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밥 사주는 남자들이 남녀 관계를 주도했다면 이제는 밥 사주는 누나들이 이끌게 됐다는 것은 꽤 반가운 일이다. 남녀평등에 한발짝 다가간 일이기도 하고, 경제적이나 사회적으로 안정된 여자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여자들도 이제 밥 사주는 남자들에 기대는 관계의 종속을 벗어나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밥'을 사주면서 적극적으로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고, 사회 현상은 드라마에 영감을 주기도 한다. 여전히 드라마에는 대놓고 연상녀 며느리에 거부감을 표하는 중장년층 여성들이 등장하지만 드라마 '밀회'의 이선재(유아인),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박수하(이종석), '마녀의 연애'의 윤동하(박서준) 등 연하남 캐릭터는 톱스타의 관문이라고 말할 정도로 드라마에는 연하남들이 넘쳐난다. 이제는 연하남을 만나 연애를 넘어 결혼까지 가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 연상 연하 커플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인 것처럼 보인다.

 

 주변에는 이제 한두살은 애교, 많게는 10살 연하남과 결혼한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녀들이 연하남에 빠진 이유는 제각이고 사람 나름이지만 공통적으로 꼽는 이유는 순수함이다. 나이로 순수함을 재단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연하남과 사귀는 누나들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좀 불안정하더라도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데 높은 점수를 준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도 윤진아의 전 남자친구 이규민은 직업 좋고 집안 좋은 완벽한 스펙의 남자지만 바람을 피우다 걸려 윤진아는 결국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극중 서준희는 이규민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능력은 떨어질런지 모르지만 사회의 때가 덜 묻은 소년같은 매력을 풍긴다. 부조리한 상황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맞서는 정의감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윤진아도 끊임없이 상대방을 이리저리 재고 이기적인 남자들 보다는 순수하게 감정에 이끌리고 거침없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남자에게 마음이 끌리는 누나 중 한명이었던 것이다.


  또하나는 편안함이다. 대부분의 연상의 남자들은 어린 여성에게 바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부장적인 사회 인식 속에서 형성된 애교 많고 조용하고 여성스러운 현모양처 스타일이 그것이다. 때문에 나이 많은 남성들을 만날 때는 소위 '내숭'이라는 가면을 써야하지만 동생들을 만날 때는 굳이 그런 부담감 없이 편안하게 자기 자신을 보여줄 수 있다. 극중 준희는 어릴적부터 봐온 동생이긴 하지만 진아에게 친구처럼 동등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창피한 모습도 보여줄 수 있는 편안한 관계다. 때문에 자신에게 희생하고 모든 것을 이해하기를 원하는 이규민에 비해 훨씬 자유로움을 느꼈을 수도 있다.

 

  마지막은 정서적 교감이다. 정서적 교감이야 나이를 불문하고 연애의 공통적인 요소지만 연하남을 선택한 누나들은 정서적으로 교감하기 더 쉬웠다고 털어놓는다. 연하남은 각종 문화 현상에 더 유연하기 때문에 감수성이 풍부하고 연애 역시 활동적이고 다이나믹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밥 누나'에서도 진아가 준희와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친해지는 것처럼 좀더 새롭고 아기자기한 연애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열살 연하의 남자와 연애를 거쳐 결혼에 골인한 한 친구는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는 좀 낮았지만 좋아하는 음악과 책, 영화를 공유할 수 있는 정서적 연대가 둘의 연결고리였다고 털어놨다. 그들의 연애는 화려하고 으리으리하지 않았지만 소박한 카페에서 하루종일 책을 읽고 음악을 공유하더라도 감성적인 코드가 잘 맞았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더욱 돈독해졌다.


 물론 어떤 연애도 완벽할 수는 없듯이 연하남과의 연애에서 감수해야할 부분들도 분명히 있다. 처음에는 귀여웠던 애교가 점차 어리광과 투덜거림으로 변할 때, 연상녀에게 으레 경제적, 사회적으로 완벽한 모습을 기대할 때, 아직 정신적으로 덜 성숙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이 적을 때는 연하남과의 연애에 대해 다시한번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그 관계가 건강한가가 중요하다. 연하를 만난다고 어깨가 우쭐할 필요도 없고 연상이라고 주눅이 들 필요는 더욱 없다. 다만 현재 사회적으로 연하남과의 관계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동안 틀에 박힌 성역할에 대한 반기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남성에게 주도권이 있었던 연애와 결혼에 있어서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상을 보여줌으로써 불평등한 부분을 해소하는 시발점이 되고 있다.


 지금, 문득 밥을 사주고 싶은 동생이 떠올랐다면 먼저 밥을 사준다고 데이트를 신청하고 볼 일이다. 물론 나중에 연인으로 발전한다는 보장도 없고 결국엔 '밥만 사주는 누나'로 전락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밥한끼를 사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설레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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