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은근하게 남자가 고백을 하도록 유도를 했어야지."
서연씨는 오늘도 친구의 충고에 풀이 잔뜩 죽어있다. 어찌된 일인지 한동안 썸을 타던 남자에게 연락이 통 없기 때문이다. 서로 채여도 안 창피하고 안 민망한게 '썸'이라지만, 서로 상처 받기 싫어서 하는게 '썸'이라지만, 왠지 먼저 좋아하는 티를 내고 채인 것만 같아 마음이 영 편치 않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라는 명제 하에 그저 열심히 누군가를 좋아하고 평소 마음에 둔 그에게 고백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민망함’의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 되어 있었다.
평소 호불호가 분명하고 하기 싫은 것은 때려 죽어도 못하는 'B형 여자'인 그녀는 연애에 있어서도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솔직한 성격의 서연씨는 소개팅에 나가도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오면 만면에 좋아하는 티를 잘 숨기지 못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연락을 하고 먼저 만남을 제안해 몇번 만나기도 했지만 인연으로까지는 잘 이어지지 않았다.
"왜, 한국에서는 여자가 먼저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되는 건데."
시무룩해진 서연씨는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친구에게 소심한 반항을 해본다.
"너 남자들이 결국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여자는 없더라면서 으시대는 거 본 적 있지? 심지어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격언까지 있잖어. 근데 너 용기 있는 여자가 미남을 얻었다는 무용담을 들어본 적 있어?"
"그런데, 왜 여자는 용기 있으면 안되는 거냐고."
이런 말이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왔지만 서연씨는 속으로만 삼킨다.
서연씨는 지금껏 연애도 공부처럼, 일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잘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매사에 적극적인 그녀는 대학 진학과 취업에도 자신이 만족할만한 성과를 이뤘다. 연애 역시 열심히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과 연애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물론 세상을 살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게 대학 입시, 취업 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대학때 그녀의 무모함은 더욱 심했다. 3학년때 동아리에서 평소 눈여겨 보던 남자에게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건넸을 때 '외외'라는 그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정말 ‘순수하게’ 호감을 표현했는데 그가 평소 자신이 노는 무리가 아닌 서연씨의 행동을 보고 의아해 했던 것이다. 물론 그는 그녀가 민망해하지 않게 화이트데이 때 사탕을 건네 주면서 '배려 아닌 배려'를 했지만, 은근히 소심한 그녀의 자존심은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
한번 상처를 받은 서연씨는 이후에 그런 적극적인 고백은 하지 않았다. 적극적인 성격의 그녀는 언니, 동생들은 금방 사귀었지만 유독 이성 친구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에게 연애는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과목이 되어있었다. 주위에서는 "여자는 조금씩 흘려야된다"는 조언을 해오곤 했지만 뭘 어떻게 흘리라는 건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미소인지, 매력인지.
하긴 그러고보니 그녀가 십수년간 봤던 드라마에서도 남자가 여자에게 첫눈에 반했다면서 사랑을 고백하고 저돌적으로 밀어부친 경우는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많지 않았다. 어찌된건지 죄다 여자는 관심이 없다는데 죽자 사자 따라다니는 남자들만 존재했다. 심지어 재벌에게 싫다고 따귀를 때려도 "이런 여자는 니가 처음이야"라며 그 남자는 더욱 빠져들었다. 현실에서는 고소감일텐데 말이다. 어떤 드라마는 아예 왜 그가 그녀에게 빠지게 됐는지조차 생략한 채 맥락없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남자들만 만온다. 늘 연애의 주체는 남자였고, 객체는 여자였다.
웹툰 원작의 인기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에서도 재벌 3세 이영준(박서준)은 입사 9년만에 퇴사하겠다는 비서 김미소(박민영)에게 불도저처럼 밀어붙인다. 미소가 관심없다고 딱 잘라 말하자 영준은 관심이 더욱 커져만 간다. 영준은 미소에게 뜬금없이 '결혼'을 제안하기도 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놀이공원 전체를 대여하는 등 과하다 싶은 이벤트까지 동원해 결국 그녀와의 사랑을 '쟁취'한다. 혹자는 극중에서 '퇴사'는 미소가 영준을 잡기 위한 빅픽쳐였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녀는 진정한 '밀당'의 귀재라는 것이다.
서연씨도 남녀 관계에 '밀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와 달리 얼음처럼 차가웠다. 남자들은 밀면 튕겨나가고, 당겼다가는 역효과만 났다.
"남자들은 연애도 게임이라고 여긴다고. 그러니까 그들의 승부욕을 자극해야 돼."
"내가 무슨 게임 아바타야? 축구 아바타야. 상대방의 감정까지 조종해야한다니. 좋아하는 감정을 일부러 감추고 부자연스러운 연기를 해야 한다고?"
연애 좀 한다는 친구들이 이런저런 의견도 냈고, 크고작은 입씨름을 벌이기도 했다. 점차 연애에 자신감이 사라지고, '밀당'에 흥미도 잃어가던 차에 서연씨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스쳤다. 지금까지의 친구들 대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연애와 결혼의 주도권이 모두 남자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여자는 자고로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보다 자기를 좋아해주는 남자와 결혼을 해야 돼." “여자가 먼저 고백하면 매력이 반감된다고. 반쯤은 지고 들어가는거야” "연애는 몰라도 여자가 좋아한다고 해서 결혼까지 이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어. 남자가 먼저 좋아해야지."
이처럼 어쩌면 우리는 연애와 결혼에서 남자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사회의 프레임속에 무의식적으로 노출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여자가 당당하게 먼저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하자고 프로포즈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먼저 대쉬하는 여자가 매력이 없다는 인식마저 퍼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여자들은 남자들의 선택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존재가 되어야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더 나은 남자에게 '선택'을 받기 위해 경쟁적으로 성형과 다이어트등 미모의 무한 경쟁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그런 여성들의 선택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랑에 있어서도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면 사랑에서도 한쪽은 늘 자신의 욕구를 숨기고 끌려다니는 관계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흔히들 연애는 'X자 곡선'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남자는 처음에는 눈에 번쩍 뜨일 듯한 사랑을 하고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얻으면 사랑이 식고, 여자는 처음에는 관심이 없다가 점점 사랑이 커져서 나중에는 오히려 여자가 남자에게 집착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반대의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일까.
남자에게 사랑의 시작과 책임을 강요하는 것은 서로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남자는 사랑에 능동적이지만 여자는 수동적이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도 어쩌면 가부장적인 프레임일 수도 있다.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뭔가 어색하고 매력이 없어보이고 남자가 하면 자연스럽다는 것도 우리 안의 판에 박힌 고정관념이다.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우선시하는 사회서 생겨난 편견이라는 것이다.
서연씨는 그제서야 알게됐다. 그녀가 잘못한 것은 누군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거절당했다고 자신을 자책하고 한없이 위축됐던 것이었다. 이성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기분에 우울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남자를 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찾아아했다.
이 세상의 드라마 작가들에게 고한다. 앞으로 드라마나 영화에 여자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들이대는' 능동형 캐릭터가 나온다면, 여자가 10번 들이대서 사랑에 성공하는 이야기라면, 지금까지의 사랑의 X자 곡선을 뒤집는 스토리라면 분명 인기를 끌것이라고.
서연씨를 비롯한 사랑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혹 누군가에게 거절당한다고 해서 상처받지 말자고. 아직 맞는 짝을 만나지 못 했을 뿐, 생각이 다른 사람일 뿐, 절대로 당신이 못나서 차인게 아니라고. 당신은 충분히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이 있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아직도 고백하기가 두렵다면 이렇게 한번 외쳐보자.
“싫음 말구, 아님 말고! 세상의 반은 남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