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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기자 Feb 09. 2018

나는 왜 ‘고고한 독신녀’가 되었나

   “고고하게 살어! 구질구질하게 말고”

 어느 날 한 지인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조차 잘 기억이 않지만 그 말 만큼은 비수처럼 날아와 내 가슴 속에 정확히 꽃혔다. ‘고고하게’.

 

  그 지인은 십여년간 이성을 만나기 위해 시간과 돈, 노력을 투자했지만 늘 상처만 받고 여전히 혼자인 나를 지켜 보다 못해 본인도 속상해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이었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업에 좋은 남편을 만나야된다는 ‘3종 세트’는 암묵적으로 나를 짓눌러왔고 그에 발 맞추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


 앞에 두가지 조건은 그런대로 충족이 됐지만 마지막은 맘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의 것들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내가 노력을 하면 됐지만 사람을 만나는 일만큼은 쉽지 않았다. 어떤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신문사에서 글밥을 먹은지 어언 15년. 눈 양 옆을 가린 말처럼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어느덧 혼자였다. 일의 특성상 수많은 남성 배우들과 가수들을 일상처럼 만나던 어느 날. 현실과의 괴리를 깨닫고 닥치는 대로 만남의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나가서도 외모, 성격, 능력 등을 짧게는 1시간에서 3시간 안에 한눈에 ‘스캔’당하는 기분은 절대로 유쾌하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마치 ‘결혼 고시’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가기 전에 머리부터 화장까지 2~3시간을 들여 하고 나가면 이미 진이 다 빠진 상태. 분위기가 아무리 좋아도 상대방 자신 조차 잘 알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형에 감성적으로 내가 ‘꽃히기란’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내쪽에서도 상대방을 스캔할 수도 있지만 짧은 시간에 그 사람의 인성까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직업적으로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말을 잘 끌어내는 것이 체질화되어있었지만 그마저도 점점 지쳐갔다.


 하루는 누군가 ‘여자는 말을 아껴야한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했더니 친구를 통해 ‘(그 여자) 너무 뚱하더라’는 부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썰렁해서 말을 많이 해 분위기를 좋게 해줘도 ‘너무 똑똑하다’, ‘부담스럽다’ 등의 말이 돌아왔다.


 솔직히 그동안 이성을 만나는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자부한다. 소개팅, 미팅, 결혼정보회사는 기본. 친구들과 클럽은 물론 소개팅앱까지 깔고 이성을 만나려는 노력을 해봤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질 뿐이었다. ‘설마 한명도 안 걸리겠어?’라는 가정은 점점 사실이 되어갔다.


 이성을 찾는 과정을 절대 ‘구질구질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순간 억지로 인연을 만들기 위해 낭비해버린 시간, 돈, 무엇보다 에너지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를 하는 것에 대한 허무함이 밀려들 때 쯤 ‘고고하게 살라’는 말이 귀에 와서 박힌 것이다.


 그래. 비단 연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사회가 요구하는 그 누군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만 한 것은 아닐까. 한국 사회는 예전에는 가족들 건사에 집안일에 능통하고 마음까지 어진 현모양처가 되라고 강조하더니, 21세기에 들어서는 얼굴과 몸매는 물론 머리까지 좋은 ‘알파걸’을 요구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젊은 시절과 다름 없는 미모에 뛰어난 요리 실력, 아이들 돌보기에 직장에서 돈도 잘버는 ‘슈퍼우먼’을 요구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법처럼 정해지지도 않은 이 룰을 애써 지키기 위해 발버둥칠 필요가 없었다.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그 난리를 쳤다지만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만족, 내 행복이었다. 그렇다면 결혼도 마찬가지 아닐까.


 ‘고고녀’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일말의 자존심은 살아있고 ‘팔랑귀’를 방불케할 정도로 결정 장애에 시달리지만 자기 주관은 있는. 무엇보다 현실에 쉽게 타협하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여성들을 말한다.
 
 그러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에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고고녀’들이 많았다. 어느 날은 남성중심적인 이 사회에서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고 고고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들의 존재만으로 마음 한켠이 든든했다.

 
학교와 가정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은 서른 이상, 마흔 이상의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전혀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냥 어렴풋이 결혼하고 애낳고 사는 여성의 삶을 무의식적으로 강요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삶의 경험들을 나누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롤모델’들을 통해 스스로 배우며 살아가야하는 지도 모른다.


 ‘고고녀’는 페미니즘이나 독신주의자들의 모임이 아니다. 더이상 편견에 휘둘리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 세상 모든 여성들을 위한 응원가다.


 Q. 당신이 생각하는 ‘고고한 독신녀’는 어떤 사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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