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기자 Dec 26. 2018

그는 여전히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미연씨는 오늘도 그 카페,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매일 그녀가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다.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사실 그녀가 그 카페를 찾는 이유는 따로 있다. 다름 아니라 카페 사장 때문이다. 깨끗한 인상의 그 남자. 


 "그동안 숱하게 결혼 정보회사에 등록하고, 뻔질나게 미팅에 나가도 찾을 수 없었던 남자가 바로 집근처 카페에 있었다니!“

 

 미연씨는 인연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는다. 그의 존재가 확실하게 각인된 것은 그 카페에서 맞선을 본 그 날이었다. 맞선남은 푸른 셔츠를 입고 나왔고, 공교롭게도 카페 사장도 똑같이 푸른 셔츠를 입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맞선남과 함께 앉아있으니 카페 사장이 더욱 똑똑하게 눈에 들어왔다.

 

 둘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눈인사를 주고 받는 단계로 발전했다. 사장은 미연씨가 카페에 보이지 않는 날이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냐"고 물어오기도 했고, 그녀에게 늘 마카롱을 챙겨서 서비스로 주기도 했다.

 

 미연씨는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에 대한 마음이 커져만 갔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마치 '하트 시그널'처럼 느껴졌다. 

 "이 넓은 카페에서 유독 나한테만 서비스를 줄 이유가 없잖아." 

 

 그런 생각과 함께 미연씨가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때마침 그 남자도 바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둘은 서로 눈인사를 했다. 미연씨의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져갔다. 어느 날, 카페 사장은 혼자 앉아 있는 미연씨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슨 책을 그렇게 읽으세요? 잠깐 옆에 앉아도 되요?"

 미연씨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혹시 고백이라도?"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순간 카운터에서 누군가 그를 찾았고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미연씨는 민낯이기도 했고 그가 바빠 보여서 다음을 기약하며 그 자리를 떴다.

 

하지만 다음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후 그는 미연을 다른 손님 대하듯이 예의있게 대했다. 미연씨는 이를 모를 그와 '밀당'도 해봤다. 밤이면 와인바로 변하는 그 카페에서 미팅도 해보고, 별 관심 없는 남사친과의 만남도 굳이 그 카페에서 가졌다. 다른 남자들을 만나면서도 미연씨의 눈은 사장의 일거수 일투족에 꽂혀있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연씨는 몇주간 일부러 그 카페에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그와 마주쳤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보러 카페 오시는거 맞죠? 그런데 요즘은 왜 안오세요?" 

 그녀는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좀 바바빠서요.“라고 말하며 황급히 돌아섰다.

 

‘사랑과 기침, 가난은 숨기지 못한다더니만. 그는 이전부터 내가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 그동안 그가 자신의 시선을 즐겨왔고, 혼자서만 ‘썸’을 탔다고 생각하는 순간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 그는 나에게 반한게 아니었어."

그녀의 고백을 한참 듣던 희진씨는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래. 혼자 사랑에 빠지고, 그린라이트라고 착각하고, 아닌 걸 확인하고 또 상처받고.“

 

 공연 관련 일을 하는 희진씨는 공연을 보는 것이 그녀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장르는 클래식부터 가요까지 다양했다. 지인들이 공연계에 즐비한 만큼 연말이면 구하기 어렵다는 콘서트도 그녀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녀의 작은 소망은 언젠가 남자친구와 콘서트를 보러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소망은 수년째 이뤄지지 못했다. 애써 담담한척 하고 눈길을 돌려보지만, 공연장에서 꽁냥꽁냥하는 커플들을 보는 것도 이젠 이력이 났다.

 

 그 즈음 대학 후배 P군에게 연락이 왔다. 두세살 어린 그는 잊을만하면 그녀에게 연락을 해왔다. 직장 생활의 고민이 대다수였지만, 다른 사람에게 흔히 하기 어려운 가족 이야기 등 속내도 서슴없이 털어놨다. 희진씨도 그에게 호감이 있었기에 그의 전화를 늘 잘 받아줬다.

 

 바쁜 일상에서도 "누나, 바빠요? 잠깐 통화할 수 있어요?"라는 그의 메시지가 뜨면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은 그가 또 무슨 이야기를 할까. 희진씨는 편도선염으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을 때도 목이 터져라 그의 직장 생활 고민에 대해 충고를 건넸다. 

 

 희진씨는 약간 소심하지만 자상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P군과 음악적인 성향도 잘 맞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가수는 김동률이었다. 매년 김동률의 콘서트에 혼자 또는 동성 친구와 갔던 희진씨는 용기를 내서 P군에게 동행을 제의했다. P군은 늘 보고 싶어하던 가수라며 뛸듯이 기뻐했다.

 

 눈 내리는 어느 추운 겨울날. 콘서트 며칠전부터 희진씨의 마음은 설렜다. 늘 업무의 연장으로 느껴지던 공연장이 그렇게 아름다운 곳인 줄 처음 알았다. 그녀는 새로 산 하이힐을 신고 할 수 있는 만큼 있는 한껏 자신을 꾸몄다. 

 

 공연장 앞 카페에서 P군을 만나기로 한 희진씨. 눈이 와서 길은 미끄럽고, 새로 산 구두는 굽이 높아서 불편한데 공연장으로 가는 길은 하필 비탈길이었다. 희진씨는 P군에게 의지해서 한걸음씩 옮겼다. 마치 연인처럼 그의 팔을 붙잡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은 희진씨. '사랑한다는 말',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등 김등률의 달달한 발라드 속 주인공이 자신이 된 것만 같았다. 그녀는 2시간 반의 공연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몰랐다. "아, 썸남과 공연을 같이 본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이후 맥주를 한잔 하면서 공연의 감회를 이야기하던 두 사람. 두세달 만에 보는 날이었지만, 그날따라 그는 숨겨온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했고, 둘의 사이는 더욱 더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그가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을 건넸다.

 "누나, 근데 나 최근에 좀 웃픈 일 있었어"

 "무슨?"

 "나, 사실 그 사이에 누군가를 사귀었어."

 "그 몇 달 사이에?"

 "응. KTX를 타고 지방에 가는 데 옆자리에 너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앉아서 용기를 내서 말을 걸었지 뭐야. 그 계기로 좀 만났지."

 "아, 그랬구나."

  

 소심해서 좋아하는 여자한테 고백 한마디 못할 줄로만 알았던 P가 먼저 여자에게 대쉬를 하고 사귀었다니. 희진씨는 무언가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십수년간 그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P도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하는 남자구나.’ 희진씨는 오랜시간 서로 관심이 있다고 혼자 착각한 생각을 하니 마음 한구석이 허탈했다. 그녀는 아직도 그날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보니 미연과 희진은 둘다 숱한 '짝사랑'의 흑역사가 있었다. 차마 '썸'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기억들이다. 오랫만에 연락온 남자가 관심이 있는 줄 알고 혼자 설레다가 결국 만나지도 못한 기억, 한참 어린 연하남에게 밥 사주는 '그냥' 누나라도 되려고 했건만 그는 밥만 잘 먹은 채 며칠 뒤 연락이 두절된 기억. 대학 때 뜬금없이 초콜렛 줬던 관심남의 얼굴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우연히 만난 이상형에게 어렵사리 공연을 보자고 제안했다가 시간이 없다고 에둘러 거절당했을 때의 민망함은 톡메신저의 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되돌아 보면 웃프고 씁쓸한 기억이다. 누군가를 좋아한 그때의 내가 귀엽기도, 때론 처량하기도 하다. 그만큼 순수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이젠 연애 세포마저 말라버려 누군가에게 쉽게 설레기도 다가가기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 사랑은 일방 통행이 아닌 쌍방 통행이어야 하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안 순간,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아님 말고’ 정신으로 청춘 사업에 매진하라지만, 한살 한살 나이를 먹으면서 그마저도 쉽지 않다. 이젠 누군가에게 상처받는 것도 싫고, 자존심 상하는 것도 속상하고, 더이상의 감정 낭비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오늘도 썸만 타거나 짝사랑만 하다 마는 당신에게 누군가는 냉정하게 말할 것이다. 그는 여전히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서로 물고 뜯지 못해 안달난 이 삭막한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충분히 아름답다. 단지 그것이 집착만 아니라면. 때문에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일에 너무 주눅들거나 위축될 일은 아니다.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상처받을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도 만일 상대의 주변에 썸녀들이 너무 많아 보이거나 앞으로도 당신에게 반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면, 쿨하게 포기하는 것이 당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무기력한 패배의식이라기 보다는 나 자신을 위한 더 큰 발전을 위한 1보 후퇴다. 대신 늘 새로운 누군가를 갈구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 있던 화살표를 한번쯤 나에게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 지친 나 자신을 보듬고 위로하면서. 누군가가 이야기했듯이, 사랑은 결코 구걸하는 것이 아니니까.

이전 13화 혼자서 아파본 적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