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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기자 Oct 23. 2018

어느 '연애 포기자'를 위한 변명

  "이제 더이상 인위적으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왜요? 시간이 아까워서? 귀찮고 지쳐서?"

  "아니. 나한테 나쁜 영향을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혜리씨는 친한 언니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교직에 종사하는 언니는 자타공인 신부감 1위로 불려왔다. 참한 외모의 언니가 눈이 좀 높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더이상 누군가를 애써 찾지 않겠다는 말은 일종의 '연애 포기' 선언처럼 들렸다. 그녀들은 불과 몇달 전까지만해도 거의 매주 미팅을 함께 하며 동고동락을 하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동안 남자를 찾아 헤맬 시간에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더 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추진했다면 어땠을까 싶어. 언젠가 결혼할 것을 계속 염두에 두느라 내 일과 커리어는 다 뒷전으로 미뤘거든. 결국 일도, 남자도 못잡은 꼴이 된 거잖아." 

 

 언니의 다부진 말투에 혜리씨도 뭔가 가슴 한구석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나이를 한살 한살 먹어가면서 그녀는 마치 누군가 내준 숙제를 마치지 못한 학생처럼 남들이 흔히 말하는 '좋은‘ 남자를 만나야한다는 강박에 휩싸였다. 그 숙제를 누가 내준지도 모른 채. 

 

 이후 그녀들은 '만남'에 중점을 두고 모든 일을 계획했다. 주말에 하루 쉬고 싶어도 누군가 소개팅을 해준다고 하면 만사를 제치고 나갔고, 뭔가 ‘건수’를 만들어 끊임없이 만남의 자리에 나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혜리씨는 연애하고 결혼하기 위해 ‘전투적으로’ 노력했다. 처음에는 낯선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만남을 준비를 하는데만 최소 2시간.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짧게는 2시간 혹은 그 이상 끊임없이 이야기 소재를 생각하고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했다.

 

 좀더 자연스러운 분위기라면 어떨까 싶어서 미팅을 나가봤더니. 웬걸. 이건 더 치열한 '체험! 삶의 현장'이다. 여자들끼리의 미묘하고 치열한 미모 경쟁에 눈치싸움까지. 어느날 혜리씨는 친구가 부른 미팅 자리에 아무 생각 없이 나갔다가 필라테스 학원 강사가 앉아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필라테스 강사의 옆에 앉아 자신의 뱃살을 가리기에 바빴다.


 어느새 점점 그녀에게 연애는 어려운 '시험'같은 과목이 되어있었다. 누군가를 만나기도 어렵지만, 상대의 기대감을 높이려 밀당을 하고, 사랑했지만 다시 서로에게 실망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지치는 과정인지. 모든 경험은 사람에게 득이 된다지만, 때로는 나는 사라지고 가슴 속에 생채기만 가득 남기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을때도 있다. 마이 묵었다 아이가!


 

   그런데 혜리씨는 남자들도 종종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혜리씨는 평소 방송계에 종사하는 남성과 우연히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그는 푸념 섞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실 3년전에 회사에서 베트남 지사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절했어요. 그때는 빨리 짝을 찾아서 결혼해야하는데, 베트남에 나가면 결혼도 못하고 나이만 먹을 것 같아서 거절했거든요. 결국 결혼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친 셈인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까워요. 제 인생이나 커리어에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후로 3년의 시간이 그냥 흘렀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은 그는 최근에 대형TV와 가구를 새로 바꿨다. “결혼하면 새로 사려고 10년째 TV를 바꾸고 싶었는데 참았어요. 그런데 그냥 이제는 결혼에 너무 구애 받지 않고 제 마음 가는대로 살려구요.”

 

 혜리씨는 친분이 있는 영화 제작자와 통화를 하다가 연애 이야기로 소재가 모아졌다. 그는 연락이 오는 여자들이 꽤 있는데도 마다하고 집에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여자 분이 먼저 만나자는 전화가 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나이 되니까 어떤 이야기를 할지 대충 촉이 와요. 물론 여러모로 괜찮은 친구들이죠. 그런데 왠지 나가고 싶지 않아요."

 "왜요? 남자들은 다가오는 여자를 마다하지 않는다고들 하던데"

 "글쎄. 예전에 연애를 했다 실패한 경험이 있기도 하고. 그냥 누군가를 알아가고 사귀고, 다투고 상처를 주고 받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너무 지치고 힘든 것 같아요." 

 

 혜리씨는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서 왠지 진정성이 느껴졌다. "다 내가 다 게으른 탓"이라고 자책을 했지만 그의 말 속에는 생각할 거리가 있었다. 남자건 여자건 상처받기 싫어하는 것은 매한가지일테니까. 

 

 세상의 미디어는 오늘도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는 유죄"라는 메시지를 쏟아내지만, 때론 연애 냉담자가 된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들은 연애를 포기했다기 보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지금 진정한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기에.

 

 내가 없는 사랑은 쉽게 지치고 결국은 상처받은 채 끝나기가 쉽다. 때로는 무조건 사랑을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애를 하는 내 모습을 사랑해서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을 붙잡고 있는 관계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의 삶을 함께 높이는 건강한 연애. 지금 '연애 포기자'들은 그런 사랑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잠시 사랑의 행보를 멈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건강하지 않은 사랑은 나를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짐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연애 포기자'들은 지금 어쩌면 진짜 사랑을 찾기 위한 기나긴 '동면'에 들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잠시 사랑을 찾아 해메는 대신 시간을 아껴 나 자신을 좀더 알고 나를 먼저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그래서 한층 성숙해진 그들 앞으로 다가올 진짜 사랑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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