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5 에콰도르 키토시

Veci, Mijito, 그리고 내 사람

by 유엔이방인 김상엽
“¡Veci!”

위층에서 나는 소리였다. 날카롭고 단호하며, 마치 조약돌이 물을 튕기듯 명확하고 깊었다. 내 이름은 아니었지만, 어떤 직함보다 더 정확하게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카르멘이 발코니에 기대 서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 행주를 들고, 다른 손에는 노랗게 익은 망고를 들고 있었다.

“¡Toma! Está madurito.”(받아요! 망고예요.)


망고가 날아왔다. 나는 급히 손으로 받아 들었다. 햇볕에 익은 과일의 무게와 향이 손끝에 느껴졌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키토에 처음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 당시 나는 아버지였고, 외국인으로서, 국제기구 보고서를 작성하는 직장인이었다. 하루는 UN, SDG, Resilience 같은 용어로 가득 차 있었지만, 현관 앞 좁은 골목에서 들려오는 언어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너, 여기 있는 거 알아.”


키토는 해발 2,800미터에 위치해 있다. 파나마의 눅눅한 공기에 익숙했던 내가 이곳에 올 때마다 공기는 생소하게 느껴졌다. 숨이 짧아지고, 문장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끝없이 오르내리는 거리와 차 경적 소리가 긴장감을 더했지만, 모두가 침착하게 행동했다. 개들은 길 한복판에 태평히 누워 있었고, 행상인은 가격보다 농담을 더 크게 말했다.


그리고 어디서든 항상 ‘Veci”가 먼저였다. 경비원, 배달원, 은퇴한 노부부, 수레를 끌던 정비공까지 모두 나를 그렇게 부른다. ‘Veci’라는 말은 이웃이라는 의미이지만, 사전 뜻보다 훨씬 넓고 부드럽다.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모두에게 다 주는 호칭이었다.


한 밤의 정전을 기억한다. 현관 앞에서 열쇠를 찾으며 가방을 뒤적일 때, 뒤에서 슬리퍼 소리가 들렸다. 촛불 하나가 어둠을 가르며 밝혀졌다. 도냐 릴라였다.

“No tengas miedo, mijito,”


나는 이미 거의 마흔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이의 제약을 벗어난 존재가 되었다. 그녀의 한마디는 나를 낯선 외국인이 아닌, 품어야 할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 말 앞에서 체면과 선입견이 모두 무너졌다.


나는 배웠다. 이곳의 언어는 지위보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어지고 자연스럽게 돌려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집에 과일을 두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들르는 이웃을 위한 것이었다. 우산을 두고 간 사람을 위해 문 앞에 하나 걸어두었다. 개의 이름도 외우게 되었고, 걸음도 조금씩 느려졌다. 모퉁이의 아보카도 장수와 인사를 나누며, 의미 없는 대화의 필요를 알게 되었다. 이곳 사람들의 말은 설득이 아니라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직장에서는 항상 ‘지역사회 참여'에 대해 논의했다. 회의록, 예산, 절차 같은 것들이었지만, 사실 동네는 이미 참여 그 자체였다. 승인이나 계획 따위는 불필요했다. 삶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끓인 렌틸콩, 무심한 축복, 병원 데려다주는 차, 잠깐 내 자리를 지키는 눈길. 예고도 감사를 강요하지 않았다.


출장에서 돌아온 날, 도냐 릴라가 내 손에 접시를 건네주었다. 그 위에 흰 밥과 달걀 프라이 하나.

“Veci, ¿ya comiste?”


나는 반사적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더니 답했다.

“No entiendo. Pero suena bonito.”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쁜 말이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감사의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느껴지는 건, 함께 있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한 번은 서울 친구에게 veci와 mijito를 설명해 준 적이 있다.

“그냥 예의상 하는 말 아냐?”
“아니야. 예의가 아니라 존재야.”
“근데 가족은 아니잖아.”
“맞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가족이 아닌데 가족처럼 부르냐고. 나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언어는 번역하는 순간 의미를 잃는다. 한국어 호칭은 질서와 위계를 나눈다. 형, 누나, 어머니. 타이틀은 친밀함과 거리감을 동시에 준다. 반면, 키토에서는 그런 구조가 희미했다. 대신, 과일과 웃음, 작은 호의가 있었다.


처음에는 두려움이 컸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라서였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곳에는 규칙이 아니라 리듬이 있다는 사실을. 빚과 의무가 아니라 주고받음의 순환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결국 번역을 멈췄다. 나는 기꺼이 'veci'라고 불리었고, 어느 날 울고 있던 아이에게 “mijito'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이는 울음을 멈췄고,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은 마치 조용한 노래의 정확한 음을 찾은 것 같았다.


어느 아침, 카르멘이 발코니에서 다시 불렀다.

“Veci, va a llover.”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회색 하늘. 그녀는 “조심해”거나 “우산 챙겨”라는 말 대신, 단지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분명히 배려심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젖지 않기를 바라며, 마치 내가 그녀의 사람이기라도 한 듯 다가오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깨달았다. 소속감은 기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보여줌은 문법이 아니라 일상 속 호칭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래서 지금도 자문한다. 세상에 몇 개의 언어가 있을까. 문법이 아니라 관계로 배우는 언어. 내 사람이 아니어도 내 사람처럼 아낄 수 있다는 말을 품은 언어. 그 언어들이 내 안에 남아 있는 한, 나는 여전히 키토의 veci이고, 누군가의 mijito다.


06 <칠레 산티아고시>를 기대해 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