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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칠레 산티아고시

Compromiso and the Quiet Weight of Loyal

by 유엔이방인 김상엽

그가 남긴 것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문서나 서명, 기한 따위는 없었다. 공중에 떠 있는 한 줄의 말이 스스로 무게를 견뎌야 하는 듯 팽팽히 떠 있었다.


나는 산티아고 외교부 5층 복도에 서 있었다.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 한 잔은 블랙커피, 다른 하나는 설탕이 가득 든 것. 장관 보좌관은 긴 회의 후에 지나가며 짧게 말했다.

“Es un compromiso.”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었다. 복도는 조용했고, 건물 내부에는 종이와 청소약 냄새가 섞여 있었다. 창밖에는 낮게 깔린 언덕들과 끝내 닿지 못할 듯한 안데스 산맥이 겹겹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개 끄덕임이 곧 수락이었다.


처음에 나는 책에서 배운 대로 'compromiso'라는 말을 이해했다. 칠레는 우리의 투명성에 대한 'compromiso'를 재확인했고, 정부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compromiso'를 유지했다. 전체적으로 명확했고 자존감이 드러났으며, 애매함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만난 compromiso는 달랐다. 점심이 길어져도 누군가 자리를 지켜주고, 버스가 늦어도 끝까지 기다리며, 사소한 부탁조차 잊지 않고 돌아와 건네줄 때, 그들은 말했다.

“응, 이건 compromiso야.”


그 말은 마치 문을 여는 따스한 손길 같았다. 강제로 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신뢰를 쌓아가는 방법이었다. 늦은 밤, 번역 자료를 정리하던 중, 청소부 아저씨가 있었다. 내가 감사 인사를 하자, 그는 폴더를 건네며 미소 지었다.

“Se lo prometí. Es mi compromiso.”


커피를 권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는 무례가 아니라 자연스러움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Compromiso'는 의무(duty)와 유대(bond)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단어라는 사실을. 한국어의 “책임”은 너무 무겁고, “약속”은 너무 가볍다. 어느 것도 발코니 대화나 닫힌 문 안의 속삭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가을 어느 날, 유럽연합 대표단과의 협상이 결렬된 직후였다. 긴장감에 휩싸인 복도에서 한 외교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No era por el texto. Era por el compromiso.”(문장 때문이 아니었어요. 그건 약속 때문이었죠.)


그녀가 지켜낸 것은 정책이 아니라 함께 걸어온 사람들과 신념이었다. 외교 세계는 침묵으로 가득 차 있지만, compromiso는 그 침묵을 뚫고 나왔다.


대표단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젊은 분석관이 연설 후 무표정을 유지하며, 서명 직전의 긴장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에 그 자리에는 항상 헌신이 있었다.


한 번은 신뢰를 잃은 두 그룹을 중재하는 일을 맡았다. 도표와 절차를 통해 방을 채웠지만, 공기는 마치 돌처럼 딱딱했다. 오랜 침묵 후, 한 원로 대표가 말을 꺼냈다.

“Sé que la última vez fallamos. Pero esta vez, va a ser distinto. Es un compromiso.”(지난번엔 실패했어요. 하지만 이번엔 달라질 거예요. 이건 약속입니다.)


그는 서명을 원하지 않았고, 단지 눈을 바라보길 바랐다. 그 순간 방 안의 긴장이 풀어졌고, 설명이나 증명은 필요 없었다. 한마디 말과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한국에 돌아온 후, 나는 이 단어를 번역하려고 노력했다. Commitment, dedication…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아, 책임감?”


아니었다. Compromiso는 부담이 아니다. 강요가 아닌 선택이며, 부탁받지 않아도 잡아주는 손길, 칭찬받지 않아도 끝까지 지키는 마음이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왜 어떤 언어는 약속에 온기를 남길 공간을 만들지 않을까. 왜 기록된 맹세는 남기면서도, 끝까지 쥐고 있던 손길은 잊혀지는 걸까.


아마도 'compromiso'는 서류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계속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외면당하지 않고, 잊히지 않으며, 끝까지 붙잡고 싶은 마음의 이름이다.


07 <미국 뉴욕시 유엔본부>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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