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spora and the Grammar of Longing
나는 책으로 디아스포라를 배웠다. 그러나 목소리로만 그 무게를 알게 되었다.
포덤대학교 대학원 강의실은 오래된 나무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벽에는 해방, 망명, 카니발을 주제로 한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고, 나는 낡은 책상에 앉아 쿠바, 도미니카, 푸에르토리코, 콜롬비아 출신의 동료들 사이에서 늘 약간 비켜 서 있었다. 그들의 억양에는 국경선과 항구, 기억과 분열이 뒤섞여 있었지만, 이는 지리적 위치를 넘어선 무거운 정서였다.
강의계획서에 제시된 정의는 간결했다. “디아스포라: 고향에서 떠나 흩어진 사람들의 경험.” 우리는 그 어원을 연구했고, 학자들의 분류 방식을 외우며 토론했고, 문장을 나누어 분석했다. 하지만 그 모든 정의는 마치 도표처럼 보였다. 선명하지만 따뜻함이 없는 그림이었다.
어느 날, 천둥이 치던 오후에, 말라베 교수가 조용히 물었다.
“세대가 떠나면 무엇이 사라집니까? 그리고 무엇이 남습니까?”
학생들은 언어, 전통, 관습, 교과서적인 답변을 내놓았고, 분위기는 경감되기 시작했다. 그때 옆에 있던 훌리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검은 머리를 깔끔하게 빗으며, 그는 망설임이 배어 있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Mi padre creía en la revolución.”(내 아버지는 혁명을 믿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더니 덧붙였다.
“나는… 살아남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이 전부였다. 방은 마치 물속처럼 고요해졌다. 아무도 박수를 치거나 웃지 않았다. 그 문장은 오랫동안 붙잡히기를 바라는 것처럼 공중에 떠 있었다. 그 순간, 책 속의 정의는 사라지고, 디아스포라는 살아 숨쉬는 존재로 변화했다.
수업이 끝난 후, 빗속에서 난간에 기대고 있던 그에게 내가 말했다.
“무겁네.”
그는 시선을 떨군 채 고개를 끄덕였다.
“Más que palabras.”
그날 이후로 나는 도서관 서가, NGO 회의실, 이민자 상담 테이블에서도 그의 말을 떠올렸다. ‘나는 살아남는 것을 믿습니다.’ 이는 패배나 후회가 아닌, 지금도 계속되는 신념이었다.
한국어에는 망명, 이주, 향수와 같은 단어가 있지만, 신념과 생존, 기억과 희망을 한 문장에 담은 표현은 없다. 나는 번역을 시도했지만, 결국 그 의미는 숨겨지고 말았다. "괜찮아.” 그가 말했다, 그러나 웃음은 없었다.
그러나 웃지 않았다. 그날 학교 공원에서 나는 물었다.
“왜 하필 ‘믿는다’는 거야?”
그는 젖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걸 보며 대답했다.
“우린 과거를 바꿀 수 없어. 하지만 믿는다면… 다가오는 걸 견딜 수 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겪지 않은 혁명과 그가 감당해야 할 삶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졸업 후, 나는 학회 패널에서 그의 말을 인용했다. “내 아버지는 혁명을 믿었고, 나는 살아남는 것을 믿습니다.” 청중은 정중히 박수쳤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전달한 것은 개념이 아니라, 누군가의 살아 있는 역사였음을.
몇 년 후, 브루클린의 카페에서 다시 만난 훌리오에게 나는 질문을 던졌다.
“아직도 믿어?”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믿어. 혁명이 아니라… 살아남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디아스포라는 단순히 떠난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으며 계속되는 과정 속에 새겨진다는 것. 그 믿음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도 묻는다. 누군가의 혁명을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람은 얼마나 많은 유산을 조용히 짊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무게가 그의 닻이 되어, 나라가 아니라 삶에 묶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여전히 그 문장을 되새김한다. 비록 혁명은 끝났지만, 살아남겠다는 믿음은 계속된다.
09 <콜롬비아 보고타시>를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