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z와 기다림의 기술
평화는 종종 조약 서명이나 총성의 침묵으로 정의되지만, 내가 보고타에서 본 평화는 훨씬 더 느리고, 사소하며, 훨씬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이었다.
나는 두 번 보고타를 방문했다. 첫 번째는 2008년에, 배낭 하나를 메고 도시를 걷던 초심자 시절이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2019년에는, 이미 외교 경험과 보고서, 실패와 피로에 익숙해진 나이로 다시 찾았다. 두 도시를 방문했지만, 내 시선은 달라졌다.
저녁 무렵, 라 칸델라리아 골목에서 커피를 팔던 노점상이 내게 말을 걸었다.
“No compramos paz. Esperamos.”(우리는 평화를 산 게 아니오. 우리는 기다렸소.)
그는 설탕을 천천히 저으며 눈길을 피했고, 말은 짧았지만 벽을 따라 오래 메아리쳤다. 2016년 평화 협정은 종이 위에서만 빛났으며, 사람들은 여전히 긴장을 기억했다. 벽화에는 실종된 얼굴들이 그려져 있었고, 노파들은 천막 아래에서 조용히 아레파를 구웠다. 바람이 천막을 휘젓더라도, 그들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보고타의 일상은 모순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공존하는 모습이었다. 운동장에서 소녀는 리본을 묶으며 웃고 있었고, 몇 걸음 떨어진 벽화 속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기쁨은 슬픔 옆에 있었으며, 부재는 삶과 함께 존재했다.
2019년에 다시 방문한 도시는 훨씬 조용했다. 거리의 음악가들은 저항가요 대신 부드러운 발라드를 연주했고, 새소리도 더 선명했다. 이전에 만났던 그 노점상은 늙은 얼굴로 다시 말했다.
“Esperamos.” (우리는 기다립니다.)
그는 현재형을 썼다.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어지는 문장. 내가 물었다.
“Y ahora?” (이제는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창백한 안데스 산맥을 바라봤다.
“Seguimos.” (우리는 계속 갑니다.)
그들의 평화는 단순한 명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언이 아닌 태도였다.
나는 트란스밀레니오 버스를 탔다. 붐비고 거칠며 항상 늦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젊은 엄마가 아이를 앉히자, 옆자리 남성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아무도 박수치거나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실천된 평화라는 것을.
해 질 무렵, 몬세라떼 언덕에서 본 도시의 불빛이 끝없이 이어졌다. 꽃을 팔던 여인은 꽃잎을 비닐에 싸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Paz.”
그건 선언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 여기, 존재를 지탱하는 말이었다.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 하던 자리에서도 같은 공감대를 느꼈다. 전쟁 이야기는 과거 시제로만 흘러갔지만, 한 친구가 포크를 놓으며 말했다.
“La paz no es un momento. Es un espacio que ocupamos cuando respiramos, juntos.”(평화는 순간이 아니야. 그건 우리가 함께 숨 쉬는, 공간이야.)
그 정의는 추상적이지 않고 오히려 구체적이었다. 나는 그 말을 버스, 운동장, 꽃가게와 연결지어 생각했다. 사람들은 말보다 먼저 작은 몸짓으로 평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음 날, 볼리바르 광장 근처의 카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웨이터는 우산을 건네지 않았고, 나도 요청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광장이 젖어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비가 그치자, 그는 창문을 열며 말했다.
“Parece que la lluvia también sabe que espera.” (비조차도 기다릴 줄 아는 것 같아요.)
농담처럼 들렸지만, 나는 그 안에서 도시의 박동을 느꼈다. 기다림이 바로 이 도시의 숨쉬는 리듬임을 알았다.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다른 방법으로 기다린다. 누군가 말하기 전에 망설이면, 나는 그 침묵을 더 길게 만든다. 엘리베이터에서 모르는 사람과 멈춰 설 때, 나는 휴대폰 대신 그를 바라본다. 기다림이 방해가 아니라 공간을 주는 선물임을, 나는 보고타에서 배웠다.
평화는 결국 선언문에 적히는 것보다 우리가 어떻게 기다리느냐에 더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 심사위원 앞에서 이 글을 낼 때도, 나는 말보다는 기다림으로 평화를 이야기하려 한다.
10 <페루 리마시>를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