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Eyes Spoke First
나는 포덤대학교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한 신부님의 추천으로 퀸즈의 작은 성당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여름 방학이 되면서 이 인연은 카리브해를 넘어 산타크루즈 외곽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먼지 낀 성당 커뮤니티 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함께 공부할 교실도 만드는 일이다.
낯선 대륙의 태양이 강렬했고, 내 스페인어는 늘 어디선가 서툴렀다. 문장은 마치 어색한 낡은 외투처럼 어깨에 뻣뻣했고, 그럼에도 아이들이 나를 바라볼 때 그들의 말은 문법이 아니었다.
“티처, 헬프?”
소년 하나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나는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뭐가 필요해?”
그는 칠판의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설명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한 번의 끄덕임으로 충분했다. 더 말이 필요 없었다.
부엌에 있던 여성들도 비슷했다. 내가 서툴게 “salt'라고 말하자, 그들은 발음을 고치지 않고 그냥 소금을 건네주었다. 마치 음악의 리듬을 맞추듯, 손길이 말보다 먼저였다.
어느 날, “고마워요'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에서는 뜻밖에 “sí, maestra”가 튀어나왔다. 부끄러웠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국을 저었다. 그리고 말 대신 숟가락을 건넸다.
수업이 끝난 후 복도에서 한 아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으로 감정을 전달받았다. 그날 저녁, 한 중년 자원봉사자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손길—그것은 “당신이 여기 있군요”라는 인사와 같았다.
볼리비아에서 눈을 맞추는 것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요구이자 선물이며, 때때로 말보다 강력한 표현이었다. 아이들은 큰 목소리로 글을 읽은 후, 성적표 대신 내 시선을 찾았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았고, 그것이 평가이자 격려였다.
어느 날 발전기가 멈추면서 교실이 갑자기 어둡게 변했다. 숨소리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아이들의 눈빛이 나를 향했지만 두려움이 아닌 기다림 같았다. 한 소년이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스위치보드를 가리켰고, 잠시 멈추더니 내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두려움이 없었다. 우리는 함께 스위치를 눌렀고, 불이 몇 차례 깜빡인 후 결국 교실에 빛이 돌아왔다.
그가 미소지었다. 박수와 칭찬은 없었지만, 웃음 속에는 무언의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방은 조용했지만, 인정의 분위기로 가득 채워졌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발음 교정이나 존댓말 지도가 먼저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산타크루즈에서는 전기가 돌아오자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았고, 말이 필요 없었다. 눈빛이 모든 것을 전달했다.
떠나기 전에 나는 공책을 펼쳤다. 비어 있는 곳이 많았지만, 그 안에는 문법보단 친밀감이 담겨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이 노트를 넘기며 웃었다.
“당신의 말은… 도착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도 하나의 다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 영어 발음을 틀릴 때가 있다. 아이들이 웃으며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들은 고쳐주기보단 내 어깨를 두드린다. 그럴 때마다 산타크루즈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곳에서 언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유창하지 않아도, 세심한 눈맞춤과 태도에서 더 깊은 의미가 전달되었다. 감사는 손길과 시선, 그리고 짧은 침묵 속에 숨어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눈빛이 전하는 인정이 말보다 더 오래 기억되는가. 어쩌면 언어보다 눈이 먼저, 그리고 오래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12 <세인트루시아 캐스트리스시>를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