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똑똑똑. 빼꼬옴-)
언제 마주칠까 두려워 지독히도 피해 다니던 그 녀석이 어김없이 또 찾아왔다.
그놈은 늘 예고도 없이 찾아와 제멋대로 담을 넘고, 단단히 쌓아 올린 내 세계의 모든 규칙을 한껏 어지럽힌 것도 모자라, 나를 책임감 없는 빌런으로 둔갑시킨다. 그러고 나서 나를 가둔다. 그럴 때면 왠지 자그마한 방문 밖에는 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형체의 괴물이 나를 벼르고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문만 열고 나가면 포실한 빛살이 넘치도록 온몸을 감돌고, 온갖 생동하는 생명체들이 나를 반기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일 것만 같다. 한 걸음의 용기조차 낼 수 없다. 문밖의 세상은 여전히 예전처럼 흘러가고 있을까. 왠지 나만 이곳에 갇혀있는 것 같아 두렵다. 2미터 남짓한 기장의 암막 커튼을 걷어보는 행위에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미약하게나마 요새의 형상을 띤 침구 안에서 최대한 일말의 안전함이라도 느껴보려 애썼다. 왠지 이 자그마한 네모 상자 안에 온통 묶여있는 기분이 든다. 숨 막히도록 어제와 똑같이 눌러앉은 이불 냄새. 먹던 음식들이 담겼던 그릇들은 싱크대 한쪽에 쌓이고 모여 불협화음 같은 악취를 풍긴다. 감옥과도 같이 침잠하는 공간 안에서 나는 또 어쩔 도리를 모르고 울먹이다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왠지 방조차도 숨쉬기를 멈춘 듯했다.
그래서 그 나쁜 놈이 도대체 누구냐고. 모두들 숨 쉬듯 마주하는 그 정체는 바로…
'무기력'
당차게 살아내는 시간들이 쌓이다 보면 한 번쯤 찾아와 반갑지 않은 안부 인사를 전하곤 하는 그것. 내게는 그 존재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스팸 메시지 같았다. 가장 달갑지 않은 존재랄까. 특히나 정겨웠던 미서부 오리건주의 네이버후드를 떠나, 각박한 한국에 돌아온 뒤로는 그 무력감이 더 심해졌다.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무기력에 휩싸였을 때마다 찾는 나의 믿음직스러운 비밀 병기가 하나 있었다. 엉뚱하게도 집에 있는 물건들 중 1년 이상 손을 대지 않은 것들을 정갈하게 찍어 올려 당근을 하는 것이다. '급처합니다. 오늘 안에 가져가 주실 분께 싸게 드립니다. 나눔 합니다.' 솔깃한 문구와 후한 가격을 제시하면 당근 톡은 순식간에 마비되곤 한다. 그렇게 판매한 물건만 지금까지 100건. 가끔씩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 귀하고 깔끔한 물건을 왜 그리 싸게 처분했냐며 핀잔을 듣기도 하는 나는 무려 당근 온도 50.3도를 자랑하는 당근 마켓의 충성 크리에이터다. 뭐 그렇게 팔게 많냐고. 지난날 맥시멀리스트로서 세상의 온갖 물건들을 사들인 행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품질 좋은 물건들을 팔거나 나누는 것이라 말하면 이해가 될까. 그렇다면 당근 맨이 되길 자처하는 잠시 잠깐이 어째서 무기력이라는 잔혹한 놈에게 대항할 최후의 비밀 병기가 될 수 있는 것인가.
한 번이라도 나눔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내 시야에서 멀어진 채로 구석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던 물건이 누군가에게 간절히 필요한 물건이 되는 순간의 그 쾌감을. 그리고 세상에 값지지 않은 물건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의 생동감을. 이런 기분들에 압도될 때면 심지어는 돈 낭비라고 생각하며 자책했던 과거의 내 소비가 올해의 훌륭한 소비 Top 10 안쪽에 랭크될 때도 있다. 면접에 입고 갈 옷이 없어 고민했는데 내가 나눔 한 구두와 정장을 잘 다려 입고 힘찬 발걸음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청년, 손녀딸에게 귀한 선물을 사주고 싶었는데 내가 저렴히 판매한 굿즈 세트로 생색을 낼 수 있겠다며 엷은 미소를 띠고 돌아서는 할아버지, 밤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화장실에 들락거리곤 하시는데, 그때마다 은은한 조명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찾아왔다는 아저씨, 새로 오픈하는 미용실에 내 예쁜 가구들을 배치하고 동네 손님을 맞이하고 싶다는 아주머니까지... 나는 헐값에 좋은 물건을 내줬을 뿐인데, 돌아오는 길에 양손 두둑이 감사하는 마음들을 주렁주렁 달고 온다. 가끔씩 고맙다며 작은 스낵을 건네주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과거에 내가 낭비했던 소비, 사놓고도 그 소중함을 잊고 소홀히 대했던 순간들을 새것과도 같은 설렘으로 안아주는 것이다.
다정이 뚝뚝 흘러넘치는 당근을 하고 돌아오고 나면 신기하게도 그 괴팍하던 무기력증이 어느새 달아나버리고 없었다. 그 대신 왠지 뭐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 찾아와 나를 보듬었다. 물건을 주고받으며 나누었던 짤막한 스몰 토크, 제한 없는 친절의 미소를 등가 교환하던 행위, 그리고 각자의 이야기가 달갑게 만나던 장이 내게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곤 했으니. 보잘것없던 나를 순식간에 위풍당당한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나만의 멋진 비법은 사실 이처럼 소박한 온기였다.
당근의 세계에는 팍팍한 현실 세계에 잘 없는 온정이 가득하다. 이처럼 소란하게 흘러가는 하루 속에 몸을 담다 보면 간혹 예상치 못하게 따스하고도 값진 순간들을 목격하곤 하는데, 그 시간들이 늘 내 방 안으로 포실한 빛살을 한 움큼씩 쥐어다가 풀어놓곤 했다. 잔열과도 같은 이 세계의 사랑을 나만의 고요한 비법 노트에 모아 담아 더 많은 사람들이 반짝거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책을 쓴다.
무척이나 뜨거웠던 7월, 낭만의 도시 춘천에서 우연히 포착한 풍경입니다. 포실한 뭉게구름과 짙게 드리운 소나무가 마치 어두운 세상 속에서 피어난 한 줌의 온정을 그리는 것 같아 프롤로그에 담아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