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온기 일지] 응답하라! 정성의 시간들

두 번째 이야기

by 편린

“안녕하세요! 저는 은지랑 같은 반 친구인 김민지입니다. 혹시 은지 집에 있나요?”


두 뺨을 활기차게 간질이는 햇살 아래 우리는 형형색색의 인라인을 타고 모였다. 그러고는 누가 누가 아빠에게 균형 잡는 법을 잘 배웠는지 은연중에 대결하는 개구진 시간을 보냈다. 아파트 4단지 옥외 주차장 옆에 위치한 꿈 동산 놀이터에서 만난 우리는 매주 루틴처럼 이어온 손때 묻은 교환일기장을 나눴다. 내 차례가 되어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온 날에는 내 몸집보다 훨씬 커다란 나무 책상 앞에 걸터앉아 친구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할지 고심하며 한참 동안 갸우뚱거렸다. 이야기를 공유하는 가상의 공간 하나 없이도 우리는 우리만이 공유하는 작은 세상에서 서로의 이야기들을 옹기종기 모으고 쌓아갔다. 이번엔 특별히 지난 주말 가족과 나들이 갔던 88 공원에서 주워온 네잎클로버에 정성스레 코팅지를 입혀 만든 책갈피를 끼워 넣어 일기장을 꾸몄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동네 비디오 가게에 들렀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친다지. 이번 주에 들어온 신작은 미국에서 건너온 아주 무시무시한 공포 영화란다. 듣기로는 이 영화를 한 번 보면 최소 사흘 밤은 뜬눈으로 지새워야 한다고.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사촌 오빠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또 온종일 졸라서 함께 우리만의 섬뜩한 시간을 보내야겠다. 하루에 테이프를 2개씩만 빌릴 수 있으니 어서 빨리 지난주에 빌려온 <천사들의 합창>부터 반납해야지. 가끔씩 이리 눈물을 쏟게 하는 영화는 테이프를 있는 힘껏 감아 반납 전에 한 번씩 더 돌려보곤 한다. 욕심내다 반납 기한을 놓칠 때면 단골 찬스로 아저씨에게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하면 그만이니.


바싹 불고기가 바삭바삭 타는 소리와 함께 엄마의 밥 먹으라는 잔소리가 들려오는 저녁 시간이 시작됐다. 나는 방구석에서 친구들을 향한 애정을 가득 담아 소리바다표 CD를 굽고, 굽이치는 노래들을 내 MP3에도 담았다. 그러고 나서 이리저리 잔뜩 까진 은색 폴더 폰을 꾹꾹 눌러 괜스레 눈길이 가던 남자아이에게 떨리는 마음을 전하고는 진동이 울리길 한참 동안이나 기다렸다. 침대 속에서 사부작. 책상 앞에서 또 사부작. LMS로 넘어가지 않는 선에서 내 마음을 축약하길 거듭하다 겨우 보낸 문자 한 통은 참으로 정성스러웠다. 종종 나도 큰 파장으로 진동하는 한 통의 묵직한 메시지를 받을 때면 두고두고 보기 위해 보관함에 고이 모아두었다.


볼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던 세상. 뒤섞여 부대끼며 잔잔한 행복감을 느끼던 세상. 그 시절을 향유하던 우리에겐 항상 긴 호흡의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심사숙고하며 고민하는 시간들이 쌓여 우리들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 시절을 지내온 나는 온통 짧은 기록들로 가득 찬 지 한참이나 흘러버린 지금도 다소 고집스러운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아이패드 필기보다는 노트 필기를. 장문의 카톡보다는 한 장의 손 편지로 마음을 전하는 것을 선호하는. 우리가 여전히 서로에게 한없이 느릿하고도 다정한 사람이기를 바라면서.


“안녕! 지금은 다들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서로에게 바짝 붙들어맸던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졌어. 모두가 길게 늘어진 일들을 쫓던 날들이 말이야. 우리의 시간이 여전히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어. 그리고 되도록이면 정성스럽게.


옛 감성이 잔잔히 느껴지는 여름의 한가운데를 사진에 담아봤어요. 가을이 오기 전에 덥지만 활기찬 여름만의 시간들을 좀 더 열심히 붙잡고 싶어졌습니다. :)


https://brunch.co.kr/@pyeonrin/17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02화[온기 일지] 코리안 인사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