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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슬 Nov 01. 2020

그때는 이 우정도 사소해질까?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박연준(달)」

   스물네 살에 나는 매일 아침 830번 버스를 탔어.

   그 버스는 일산에서 출발해 자유로를 타고 성산대교를 건너 영등포에 도착해. 늘 잠이 부족했던 나는 일산을 빠져나가기 전에 기절하듯 잠들어 성산대교에 진입할 때쯤 겨우 정신을 차렸어.

   너무 깊게 잠들어서 당산역이나 영등포구청역쯤에서 눈을 뜬 날에는 그게 그렇게 억울할 수 없었어. 회사가 서울에 있어서 좋은 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딱 하나, 하루에 두 번 한강을 볼 수 있다는 것뿐이었거든.


   나는 아침보다 밤을 좋아하지만 밤의 한강보다는 아침의 한강이 좋아. 아침에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것들이 더 잘 보이지만 밤에는 인간이 만든 것밖에 보이지 않잖아.

   그러니까 불빛 같은 것들. 찬란하게 아름답지만 계속 보고 있으면 왠지 쓸쓸해지는 것들.


   여덟 시까지 출근해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고 나면 본격적으로 하루가 시작됐어. 어린이 테마파크의 아침은 몹시 분주해. 아침에는 주로 단체 이용객들이 입장하거든.

   아홉 시가 되면 음악이 나오고, 음악이 나오면 잔뜩 흥분한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우르르 몰려들어. 모든 직원은 음악이 끝날 때까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어야 해. 우리의 얼굴이 곧 회사의 얼굴이니까.

   나는 웃고 싶지 않을 때도 잘 웃는 사람이었어. 신입사원 연수 때, 동기들 앞에서 부장이 나를 칭찬하며 말했어. 하현 씨는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고. 어쩌면 늘 그렇게 웃고 있냐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또 웃었어.


   희 언니는 백 명이 넘는 직원들 중에서 가장 영혼 없이 웃는 사람이었어. 언니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은 뭐랄까, 상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추어탕집에 끌려와 먹지도 못하는 미꾸라지를 억지로 삼킨 사람 같았어.

   개장 시간도 폐장 시간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언니의 환영이 나는 좋았어.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는 게 그때의 나에게는 어떤 위로가 되었던 것 같아.


   언니는 서른 살이었어. 적게는 열아홉, 많아봤자 이십 대 중반이었던 우리에게 서른은 너무 크고 먼 숫자였어. 그래서였는지 동기들은 언니를 좀 어려워했어.

   나는 아직도 언니의 핸드폰을 기억해. 언니는 우리 중 유일하게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거든. 근무 일정표부터 시작해 조회 시간 변경 안내까지 회사의 크고 작은 공지사항은 모두 카카오톡을 통해 전달되었는데도.


   문자 메시지로 언니에게 공지를 전달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내가 맡게 됐어. 나는 이상하게 처음부터 언니가 별로 어렵지 않았거든. 그렇게 문자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어. 언니는 서울의 북쪽에 살고 지하철로 출퇴근을 했어. 동기들 사이의 미묘한 정치 싸움에서 나와 같은 편이었고, 나처럼 회사에 대한 확신도 애정도 없었어. 이전 직장에서 일하며 혼자 힘으로 학자금 대출을 모두 갚느라 모아 놓은 돈은 많지 않다고 했어. 대체로 조용한 편이었지만 친해진 뒤에는 장난도 곧잘 쳤어. 그럴 때면 언니는 진짜로 웃었어.     


   그곳을 먼저 떠난 건 나였어. 버티고 견디는 일보다  도망치는 일에 익숙했던 내가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말했을 때, 언니는 놀라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어. 마지막 근무를 끝내고친하게 지냈던 동기들과 조촐한 송별회를 했어. 즉석떡볶이가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익숙한 작별 인사를 주고 받았어. 왜, 그런 거 있잖아. 앞으로도 계속 연락하고 지내자는 말. 지키지 못할 걸 알면서도 괜히 하는 약속들.


   하지만 언니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 떡볶이를 다 비우고 볶음밥을 먹을 때까지도,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역으로 가는 동안에도. 언제일지 모를 다음을 기약하는 대신 언니는 말했어. 환경이 바뀌면 멀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그러니 그냥 어디서든 잘 지내라고.

   그렇게 냉정한 말이 이렇게 다정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 그날 밤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어.


   이제 전화로는 할 수 없는 말들이 생겼다. 우리 사이에 비밀이 생긴 게 아니라,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 짧게 전달할 방도가 없었다. 이러저러한 일들. 말하기 위해서 많은 설명이 필요한 일. 설명이 필요한 관계는 더 이상 친한 관계가 아닐지 모른다. ㅡ(p.59~60)     


   그 뒤로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났어. 말하기 위해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공들여 설명하는 순간 시시해지는 일들이.

   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는 스마트폰을 샀다는 소식을 전했어. 너무 잘했다고, 앞으로는 더 편하게 연락하자고 답장을 보냈지. 그 메시지가 우리의 마지막이었어. 6개월이 지나자 나머지 동기들과도 연락이 끊겼어. 나는 다른 곳에서 일을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과 우리가 됐어.

   나는 언니가 좋았는데 언니도 내가 좋았는지는 잘 모르겠어. 언니 앞에 설 때면 최선을 다해 웃으며 손을 흔드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거든. 그런 나를 언니가 속으로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참 이상하게 말이야.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그곳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잊었을 거라고 확신하는데도 언니의 기억 속에는 아직 내가 있을 것 같아. 내가 그러는 것처럼 언니도 어쩌다 한 번씩 나를 떠올릴 것 같아. 이건 희망이 아니라 믿음에 가까워. 우리는 이제 서로의 연락처조차 알지 못하지만.


   언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던 바로 그 건물에서 너를 처음 만났어. 그날 우리는 어색한 공기 속에서 즉석떡볶이를 먹었지. 너는 웃기 싫을 때 웃지 않고,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웃어야 한다면 누가 봐도 억지인 표정으로 영혼 없는 미소를 지어. 나의 희 언니가 그랬듯이. 이건 그냥 단순한 우연일까?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이 책을 펼칠 때마다 나는 매번 제목에 감탄하곤 해.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말하는 걸 보면 모두의 인생은 이상하게 흐르고 있나 봐.

 

  그렇게 몇 달, 1년, 2년을 보내고 나니 ‘따로’ 보내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와 윤 사이에 조그만 웅덩이가 생긴 것 같았다. 웅덩이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둘 사이에 서로 모르는 고단한 일들이 생겨, 웅덩이로 빠져버리는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ㅡ(p.59)     

  

   가끔 우리가 멀어지는 미래를 상상해. 하루가 멀다 하고 메시지를 주고받지만 얼굴을 보는 건 일 년에 고작 서너 번쯤 되잖아.

   네 웅덩이에 뭐가 들어 있는지 나는 몰라. 우리 앞에는 각자의 삶이 장애물처럼 놓여 있고, 그걸 넘는 동안 서로 모르는 고단한 일들이 생기지.


   모르다가, 계속 모르다가.

   어느 날 문득 너무 깊고 넓어진 웅덩이를 발견하고 당황하는 날이 올지도 몰라. 더는 그걸 뛰어넘을 수 없어서 포기하고 싶어진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오늘 아침 소파에서 남편의 신간 시집을 읽다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세월이 가면 우정은 사소해진다.” 별일 없이 마음을 다치게 하네. 시는 이게 문제다. 읽다 자꾸 베인다. 다쳐도 피가 나지 않는 상처가 있다. ㅡ(p.62)     

   그때는 이 우정도 사소해질까?     

 

   나는 아직 여기까지만 살아 봐서 앞으로의 일들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어차피 알 수 없다면 마음대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이 책의 제목처럼 인생은 이상하게 흐르니까. 이상하게 흐르는 인생에는 아주 오랫동안 사소해지지 않는 우정도 있을 거라고. 그렇게 나 좋을 대로 생각하고 다른 미래는 아직 모르고 싶어.


   인터넷으로 만난 동갑내기 여자애랑 책 이야기를 하다 친구가 되어 책 이야기를 쓰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인생은 정말 이상하게 흘러, 그렇지?



   

   (하현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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