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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슬 Oct 25. 2020

패러디의 신

「배틀그라운드, 문보영(현대문학)」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장르는 공포야. 그중에서도 콕 집어 좀비.

   제일/가장 같은 말은 조심해서 써야 하는데 나는 좀비를 이야기할 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좀비물이야. 네가 절대 돈 주고는 보지 않을, 되려 돈을 준대도 보지 않을 바로 그런 영화.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얼마 전 깨달은 게 하나 있어. 내가 좋아하는 건 본격적인 좀비물이 아니라 좀비물을 패러디한 좀비물이라는 거. 그러니까 사실 나는 패러디를 좋아하는 인간인 거야.


   패러디(parody)의 어원인 paradia는 ‘다른 것에 대한 반대의 입장에서 불린 노래’라는 뜻이래. 그리고 이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paradio는 ‘모방하는 것’이란 의미를 지녔대.

   반대와 모방. 이 모순된 개념이 패러디 속엔 동시에 존재해. 절대 가까워질 수 없으면서 절대적으로 친근한 무언가가 패러디 속엔 있는 거야.



   문보영 시인은 게임, 배틀그라운드를 해본 적도 없으면서 배틀그라운드에 관한 시를 묶어 시집으로 냈어.

   그게 가능하다고?

   처음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너무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돼.


   패러디는 대상이 되는 작품을 정교하게 분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원작자만큼이나 원작을 잘 알아야만 그것과 반대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야. 그러면서도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만지고 놀리고 장난 칠 수 있기 때문이야.

     

   나는 꿈을 꾸며 꿈에서 내가 소외되는 상황을 즐길 줄 알기 때문에.     


   문보영 시인은 배틀그라운드와 가장 먼 지점에서 배틀그라운드의 모든 걸 분석했어. 그리고 이제부터 나는 그녀의 방식대로 나를 패러디해 볼까 해.

   나는 나를 해본 적 없지만,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엔 누구보다 척척박사일 자신이 있어. 나를 패러디한 이야기 속에 오직 나만이 소외될 자신이 있는 거야. 그것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패러디의 가장 큰 특징은 원작의 클리셰라 할 수 있는 부분을 차용한다는 거야. 원작 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부분을 영리하게 이용하는 거지.

   그렇다면 아마도 나라는 패러디물의 주된 클리셰는 자기연민이 아닐까. 그리고 거기엔 이런 불문율이 존재해.  

   1) 주인공은 남들 앞에서 잘 울지 않는 성격이지만, 울기 직전의 상태까지는 곧잘 간다.

   1-1) 어쩌다 눈물이 터졌다면 참지는 않되 마지막은 미소로 장식한다.

   2) 주인공은 똑 부러지는 성격을 장착한다. 차가운 인상일수록 좋다.

   2-1) 어쩌다 꿈을 꾸는 밤이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를 한다. 차가운 표정이 잠시 벗겨진다.

   3) 주인공은 외출을 극도로 꺼리지만 자주 창문 앞에 서 있다.

   3-1) 창은 되도록 넓고 창 너머는 너무 뚫려 있지 않으며 시야를 적당히 가리도록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4) 주인공은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4-1) 본인의 방어 기제를 본인이 모른다.     



   도망가는 자는 사방을 닫고 자기 자신을 즐긴다

   즐기다 들키는 것까지 포함해서 즐긴다     


   문보영 시인의 배틀그라운드 속 캐릭터들은 잘 죽어. 도망가면서, 자기 자신을 즐기면서, 그러다 들키면서 죽어. 들키려고 도망가는 것 같고, 죽으려고 즐기는 것 같아.

   게임 안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까?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게임 안에서도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걸까?


   문보영 시인의 캐릭터들은 가만히 있지를 않아. 도망가거나 쫓거나 뒤따라가거나 엎드리거나 기거나 무기를 줍거나 살피거나 경계하며 있어. 한마디로 속도가 0인 지점이 없는 거야. 이 시집에는 탈출 속도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이래.     

   *탈출 속도 = 지상에서 쏘아 올린 인공위성 등이 무한히 먼 곳까지 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초속도     


   속도를 구하는 방정식을 나는 모르지만, 게임 속 캐릭터들의 탈출 속도만은 그냥 알 수가 있어.

   그건 바로 전속력이야. 정확한 수치로 설명되지 않는 전속력, 그 자체야.

   그리고 나의 패러디 또한 전속력을 다해 나를 떠나가고 있어. 나라는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점까지, 어쩌면 그 지점을 넘어서더라도 속도를 늦추지 않을 거야.

   

   이 탈출이 영원히 멈추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     



   밤이

   납작 엎드려서 뒤에

   서 있던

   낮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계속 엎드려 있으십쇼     

   

   다시는

   일어나지 마십쇼     


   위의 시구가 등장하는 시의 소제목은 ‘어떤 감정은 이렇게 소개되었다’야. 그리고 나 역시 이렇게 소개되고 싶어. 날 바짝 엎드리게 만들어서 내 뒷면에 붙어 있는 것들을 등장시키고 싶다고.

   그것들은 분명 어두운 것만은 아닐 거야.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길 동안 내게 보살핌 받지 못한 다른 부분들, 그런 걸 거야.   

  

   나라는 패러디물을 가장 재밌게 시청할 사람은 아무래도 너 같아.

   패러디를 패러디로 온전히 즐길 수 있으려면 원작에 대한 높은 이해도는 물론이고 이것이 패러디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하거든. 너무 슬픈 상황에서도 너무 슬퍼하지 않고 너무 심각한 상황에서도 너무 심각해지지 않는 그런 사람.

   그리고 보기 좋게 별 한 개짜리 평점을 줄 사람 역시 너일 거란 생각이 들어. 아마도 이런 코멘트와 함께이겠지.

   ★☆☆☆☆

   역시 원작이 낫네요! ㅉㅉ.


   그러면 나는 전속력 따윈 잊고 더없이 기뻐할 거야. 미소로 나를 장식하지 않은 채 너의 촌철살인에 순수하게 패배할 거야. 그리고 그때의 패배는 우리는 한평생 진입의 문제를 겪었다고 말하는 문보영 시인이 이 시집에서 말하는 사랑의 모습과 많이 닮았을 거야.

  

   바로 이렇게.



   방해하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합시다


   뒤로 다가가 발로 찹시다


   너는 넘어지는 방식으로 세계에 포함되었습니다




   (이슬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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