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함과 소보로, 임지은(문학과지성사)」
얼마 전, 내가 꾼 꿈 얘기를 해볼까.
꿈속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그 사람 집에 같이 있었어. 정확히는 그 사람 침대에. 분위기가 그려지지? 오늘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일이 막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일어나려 하는 찰나에 내 휴대폰이 울린 거야. 띠리링- 띠리링- 우리는 자석의 같은 극을 쥔 사람처럼 순식간에 멀어졌지. 내게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마구 미웠어.
“여보세요.”
전화를 받았더니 걘 거야. 날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 얘가 뭘 알고 전화를 한 건지 아니면 그냥 타이밍이 이랬던 건지 헷갈리던 차에 걔가 그러더라.
“이슬. 부피 구하는 공식이 뭐더라?”
세상에. 대뜸 전화해서 한다는 말이 부피라니. 게다가 난 문과잖아. 얘가 날 놀리는가 싶어서 되물었어.
“뭘 구한다고? 부피?”
“응. 부피. 나는 지금 내 방의 부피를 알아야 해. 도와줘.”
사실 부피를 재는 건 너무 쉽거든. 가로, 세로 그리고 높이를 곱하면 그게 부피가 돼. 걔 방의 바닥엔 그 바닥에 딱 맞는 원이 그려져 있는데 누가 봐도 완벽한 원이야. 그럼 문제는 더 쉬워져. 원의 지름을 두 번 곱하고 거기에 방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의 높이를 곱하면......
그 쉬운 문제를 걔는 이해하지 못했어. 계속해서 원의 반지름만 구했거든. 그게 아니라고, 지름을 2로 나누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어. 분위기는 진작에 식고 침대 모서리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몸이 되어갈 동안 왜 자꾸 나누냐고, 나누지 좀 말라는 말만 엄청나게 하다가 꿈에서 깼어.
제일 나중에 배우는 사칙연산은 나누기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듯이 나누기는 제일 마지막 장에 웅크리고 있어. 그리고 나는 나누기를 못 하는 학생이었지.
어려운 게 아녔어. 분명 못하는 거였어. 이해할 수 없었거든. 빼면 되지, 왜 나누지? 무엇을 나누지? 어째서 나누어지지? 그걸 어떻게 믿지? 의문이 끊이지 않았어.
나는 기모입니다, 겨울에 유행하는
후드티나 바지 안을 긁어서 만든 보풀입니다
멀쩡한 것을 조금 망가뜨리면 내가 됩니다
사람에게서 사랑을 뺄 순 있어도 사람을 사랑으로 나눌 순 없잖아. 나한테서 너를 뺄 순 있어도 나를 너로 나눌 수는 없듯이. 살아감에서 희망을 빼면 희망 없이 살아가는 거지만 살아감을 희망으로 나누면 그건 그냥 온전치 못한 거잖아. 다들 그런 식으로 보풀이 되는 걸까?
꿈속에 등장한 두 남자를 나는 현실에서도 알고 있어. 특히 내게 전화를 건 남자애에 관해선 꽤 잘 알고 있지. 그 남자애는 본인의 결핍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수긍해. 절대 피하는 법이 없고 그래서 그 자릴 메우려 매번 열심이야. 보는 내가 다 안쓰러울 만큼.
그런데 조금만 유심히 그 애를 관찰하다 보면 그 애의 방식이 너무도 건강하다는 걸 알게 돼. 걔는 자주 집으로 사람을 초대해서 밥을 해 먹여. 대단한 반찬은 없더라도 정성껏 요리하지. 그리고 그걸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며 기뻐해. 나도 언젠가 그 집에 초대돼서 그 애가 차려준 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그날도 걘 그랬거든. 내 어떤 점이 자긴 무척 부럽다고, 닮고 싶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지.
나는 널 닮고 싶은데.
문이 되는 연습이 끝나지 않았는데
누군가 나를 열고 들어온다
(...)
어른이 되는 연습 없이
어른이 된 아이들은
마음을 자전거처럼 문밖에 세워두었다
아마도 그런 식으로 꿈이 끝나지 않았다면 그 애는 결국 자기 방의 부피를 구했을까?
나는 확신할 수 있어. 걔는 뭔가를 계속 나누는 방식으로 답을 찾았을 거야. 늘 문 바깥에 마음을 세워두는 나랑은 달리 자기만의 방을 여러 마음으로 나누면서, 텅 빈 방에 사람들을 초대하면서.
어제의 방은 두 명분의 부피였습니다.
오늘의 방은 열세 명분의 부피입니다.
내일의 방은 가득 찬 부피이겠습니다.
나누기를 모르는 사람은 나밖에 몰라 보여. 그런데 나밖에 모르는 사람은 아주 높은 확률로 나마저도 잘 모르는 사람이야.
뺨일 거라고 만진 곳은 엉덩이고
진심이라고 만진 부분은 주로 거짓인 벽
나는 벽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었다
망치를 들고 와 깨부수기 시작했다
벽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발견되지 않았다
튀어나온 못만이 할 말처럼 남아 있었다
튀어나온 못이 부끄러워 내가 내 방에 아무도 초대하지 못할 동안 걔는 기대고 싶은 사람들을 초대해 튀어나온 못이 못한 말은 뭐였는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뭐였는지, 실컷 떠들 거야. 그러다 역시나 답을 알아내겠지. 그건 놀라운 일도 아닐 거야.
어떤 사람들은 꿈을 계속 이어서 꾸기도 한대. 그런데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 이어질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어져야 할 이야기를 내가 이미 알고 있어서일 거야.
3 나누기 1은 3
48 나누기 12는 4
이미 정해진 답을 내가 모른다면 정해지지 않은 답 정도는 이제 알고 싶어. 그래서 내가 정할 수 있는 답 정도는 말이야.
달콤함이 입안에 남아 있습니다
가끔 다르게 불러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망고, 알맹이, 씨앗
문 뒤에 걸어두고 깜빡한 나를 찾느라 계절이 지워집니다
다음 계절엔 꼭 널 내 방에 초대하고 싶어. 우린 겨울형 인간이니까, 날이 추워지면 조금은 활동력이 높아지니까.
다정아. 기분 좋게 추운 날에 내 방으로 놀러 와. 그리고 도와줘. 내 방의 부피를 재는 일에 네가 꼭 함께해줘.
그러면 그때의 난 이렇게도 불릴 수 있을 거야.
반려 인간, 끝까지, 옆좌석, 창문, 마리모, 나란히 꽂힌 책.
(이슬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