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슬 Nov 01. 2020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김현진(다산책방)」

    이 책을 펼친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어.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이런 제목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정아는 아마 많지 않을 거야.     

  

   우리 가족은 네 명인데 나를 포함해 세 명이 이름을 바꿨어. 엄마, 나, 남동생. 아빠만 빼고 전부. 그뿐만이 아니야. 이모도, 이모의 아들도. 첫째 큰아빠의 딸과 둘째 큰아빠의 두 아들까지 모두 개명을 했어. 이쯤 되면 우리 집안에는 뭔가 있는 게 아닐까?     

  

   정아.

   그러니까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1920년대에 태어난 할아버지는 가부장제 밖의 삶을 상상해 본 적 없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어. 진주 하씨는 조선시대에(세상에... 조선시대라니...) 영의정을 지낸 유명한 양반 가문이었대. 양반이고 나발이고 명예보다 돈이 좋은 나에게는 그 얘기가 좀 우습게 들렸지만 할아버지에게 그건 중요한 자부심이었어.     

  

   뼈대 있는 가문의 대를 이을 귀한 후손들의 이름을 함부로 지을 수 있나. 결혼한 자식들이 차례로 손자를 안겨 줄 때마다 할아버지는 두둑한 돈 봉투를 들고 작명소를 찾아갔어. 최고로 좋은 이름을 지어 달라고. 그러면서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지. 이름의 끝에 조상들이 정해 놓은 항렬자를 꼭 넣어야 한다는 거였어.     

  

   그런데 그 글자는 하필이면 ‘봉’이었어.

   鳳 봉새 봉.

   그렇게 내 동생과 사촌오빠들은 모두 봉으로 끝나는 이름을 갖게 되었어.     

  

   태어나 보니 나는 여자였고, 그래서 내 몫의 봉황새는 없었어. 이름에 촌스러운 ‘봉’자가 들어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서운했어. 존재를 반만 인정받은 기분이었거든.     

  

   봉황새 대신 내가 받은 글자는 ‘정’이었어.

   姃 단정할 정.

   여기에 나 아(我)를 붙여 정아라는 이름이 된 거야.     

  

   단정할 정은 우리 시대 여자아이들의 이름에 흔하게 쓰인 글자야. 여자 여(女)에 바를 정(正)을 더해 만들어진 글자. 이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나는 궁금했어. 단정함이 단지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미덕이라면 왜 人이 아니라 女라는 부수를 사용했을까? 왜 여자아이의 이름에만 이 글자를 넣었을까?     

  

   바른(正) 여자(女).     

   여자로서 갖추어야 할 단정함. 봉황새 대신 내가 받은 건 바로 그거였어. 몸가짐이 조신하고 행실이 바른 여자. 순하고 착하고 반듯한 여자. 사람들은 새로 태어난 아이가 그런 여자로 자라기를 바라며 이 글자를 선택했겠지. 작명소 주인도, 우리 할아버지도. 아마도 그건 좋은 마음이었을 거야. 알아, 알지만…….     

  

   알면서도 그 글자에 담긴 염원이 징그러웠어.     

  

   봉황은 고대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의 새야. 아름답고 상서로운 이 새는 나라가 더없이 평안할 때만 나타나 천하의 안녕을 암시했대. 하지만 봉황새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 집 남자들의 삶은 하루도 안녕하지 못했어.     

  

   동생의 새 이름을 지어 준 역술가는 말했어. 이름에 너무 화려한 글자를 쓰는 건 위험하다고. 기가 약한 사람이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면 결국 이름에게 잡아먹힌다나.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어. 그게 아니라 벌을 받은 거라고. 아들만 귀하게 여기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괘씸해서 봉황새가 그들을 지켜주지 않은 거라고.     

  

   엄마가 동생을 임신했을 때, 나는 할머니 집에 가는 게 너무 싫었어. 할머니는 나만 보면 고추 타령을 했거든. 이번에는 무조건 고추여야 한다. 니는 무조건 남동생을 봐야 한다. 피부가 얇아 파랗게 실핏줄이 비쳤던 내 미간마저도 우리 집에 아들이 생길 거라는 증표가 됐어.

   아이고, 야가 남동생 볼라고 저러는갑다. 이번에는 고추네, 고추! 할머니의 고추 타령에 질려버린 나는 친척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외쳤대.  

   “엄마가 여동생을 낳으면 재활용 쓰레기통에 갖다 버릴 거야!”

   엄마와 아빠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사랑을 내게 주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 탄생은 실수였어. 다음 기회를 통해 어떻게든 만회해야 하는.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은 정아를 포함한 여덟 명의 여자들이 등장하는 소설집이야.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삶을 하나씩 차례로 지나 마지막 순서인 에필로그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어.     

 

   이것으로 첫날 프레젠테이션을 종료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지상으로 내려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차례가 올 때까지 정말 오래 기다리신 여러분의 순번이 드디어 돌아와, 여러분은 지금 모친의 배 속에 갓 수정되었습니다. 그리고 태아 상태인 지금부터 10개월이 지나면 대한민국이라는 곳의 여자 아기로 태어나게 됩니다. 오늘 보신 내용 중에는 그곳에서 여성으로 살아야 할 여러분의 각오를 다지기 위한 다소 자극적인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ㅡ(p.239)     

  

   여덟 편의 이야기는 아직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은 영혼들을 위한 ‘한국 여성의 삶 미리보기’ 프레젠테이션이었던 거야.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영혼들은 일제히 침묵에 잠겨. 그러다 누군가 번쩍 손을 들고 말하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저도 태어나지 않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자연유산을 시켜주세요.”

   “저 역시 자연유산을 택하겠습니다. 구천을 떠돌면서 영원히 여러 가지를 구경하는 게 훨씬 낫겠어요.”

   “저도 자연유산을 신청합니다. 아, 그런데 혹시 제 어머니에게 결혼 같은 것을 하지 말라고 전할 방법은 없을까요?”

   아무도 자연유산 대신 출생을 선택하지 않았다. ㅡ(p.242)     

  

   만약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다소 자극적인 이야기’가 내 삶이 되지는 않기를 기도하며 용감하게 출생을 선택할 거야? 아마도 나는 제일 먼저 손을 들고 말할 것 같아. 절대로, 절대로 태어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고 나는 이미 태어나버렸지. 그렇다면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것이라도 바꾸고 싶었어. 새롭게 태어나는 마음으로. 삶을 선택하는 마음으로. 그런 마음으로 오래 미워했던 정아라는 이름을 버렸어.     

  

   이슬아.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이 나는 이제 지긋지긋해. 방범용 남자 이름으로 택배를 받거나 열대야에도 창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잘 때. 혼자 택시를 타기 겁나서 차라리 밤길을 오래 걸을 때. 그러면서 자꾸 뒤를 돌아볼 때. 그럴 때면 초식동물처럼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삶이 너무 피로해.     

  

   우리는 늘 이야기하지. 우리가 여자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실망과 환멸을. 그러는 사이에 내가 분노를 동력으로만 작동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어떤 날에는 문득 마음이 서늘해져. 세상의 선의를 믿을 수 없다면 사람은 무엇에 기대 살아가야 할까. 오직 분노만 남은 인간의 세계에는 어떤 기쁨이 있을까?     

   

   하지만 탄생을 무를 수는 없잖아. 정아는 버렸어도 나를 버릴 수는 없잖아. 그럴 용기가 내게는 없어서 이 삶을 포기하는 대신 보란 듯이 잘 살아 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어.

   스스로 선택한 현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더 많은 정아에 대해 말하려고 해. 바른 여자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여자를 보여주고 싶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무엇을 택했는지는

   곧 알게 되실 것이다. ㅡ(p.246)     

 

   더 크게 떠들자.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마음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태어나기를 택했으니까.



   

   (하현의 편지)

이전 11화 왜 짐을 나눠 들어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