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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술입니다

-티너 모르티어르, <마레에게 일어난 일>

여러분은 파티를 좋아하나요? 파티하면 아마도 축하할 일이나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꼭 즐거울 때만 파티를 하는 건 아니에요. 친구와 이별할 때, 정든 집을 떠날 때도 파티를 합니다. 왜 이런 슬픈 파티를 하냐고요? 남아있는 사람, 떠나는 사람 모두 이별로 인해 너무 많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죠.


그런데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이별인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이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면 우울증이라는 마음의 병에 얻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아주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견딜 수 있도록 이별 파티를 열었습니다. 어른들은 이것을 “장례식”이라고 말합니다. 이별 파티는 본래는 떠나는 사람이 무사히 가길 기원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알고 보면 남겨진 우리에게 너무 아파하지 말라는 위로의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어리다고 이유로 이별 파티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혹 충격을 받고 무서워할지도 모르니 아이들은 이별파티에 빠져도 된다는 말은 사실 맞는 말은 아닙니다.



마레의 가장 친한 친구는 할머니입니다. 할머니는 마레가 좋아하는 과자를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거든요. 벚꽃나무 아래서 할머니와 나눠 먹는 과자는 세상에 제일 맛있는 과자고, 이 시간은 제일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할머니는 더 이상 마레와 과자를 나누어 먹거나, 그네를 타거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합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것 말곤 할머니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요. 그렇지만 마레는 이 사실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달라진 건 없으니까요. 늘 그랫듯이 마레는 할머니 침대 옆에서 그림도 그리고 만들기도 하며 할머니 몫인 과자 접시를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번 더 슬픈 일이 닥치고 맙니다. 할아버지가 마레와 할머니의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신 겁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할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을 한 번만 만져보고 싶다고 말하지만, 간호사는 할머니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간호사 입장에서는 병원의 규칙이 이별 파티보다 중요한가 봅니다. 하지만 마레와 할머니에게는 휠체어가 있었습니다. 마레는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할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달려갑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할아버지이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살아 있을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 이제야 비로소 이별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이 모두 모였네요. 할머니, 그리고 마레입니다. 또 하나, 파티에 빠지지 않는 게 뭐죠? 맛있는 음식입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마레를 쳐다보며 말합니다.      


"과자"    


과자는 할아버지, 할머니, 마레가 이 세상에서 하는 마지막 파티를 축복하는 음식이었습니다. 마레와 세상을 연결해준 최초의 언어가 “과자”였고,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인 할머니와 나누어 먹었던 것이 “과자”였고,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쓸쓸한 병원에서 누워 있는 할머니에게 마레가 매일 주었던 것이 “과자”였습니다. 과자는 마레와 할머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탄생과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은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언제 가는 누구나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마지막 이별입니다. 그렇기에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도,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떠나는 사람, 남겨진 사람 모두 그 슬픔에 빠져들지 않기 위한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마레와 할머니에게는 과자가 있는 이별 파티였습니다.그리고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말한 ‘과자’라는 말에는 먼저 떠나는 할아버지가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그리고 할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죽음을 슬퍼하는 행위를 어려운 말로 “애도”라고 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너무나 슬프고 괴롭지만 이 행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충분히 애도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주어져야만 우리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하나,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슬프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죽음이 비극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남겨진 우리가 모두 슬픔에 잠겨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거기서는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을 오로지 슬픔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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