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가 아니었다.
2006년. 8월 부푼 꿈을 안고 국내 회사의 해외영업에 입사했습니다. '군대 문화'로 유명하여 '여자'인 나를 뽑아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당당하게 면접에 임했던 것이 의외로 '통'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곳보다 '페이'면에서 '쎘'던 이 기업에 들어갈 수 있다니,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습니다.
첫날 바로 회식에서, 역시나 '센' 군대문화를 경험해 보았던 것 같습니다. 돌아가면서 외치는 건배사, 물처럼 부어라 먹어라 마시는 폭탄 주, 그리고 2차.. 3차.. 노래방까지.. 정말 순간 '도망갈까?'도 생각했지만, 신입사원이 첫 회식부터 도망갈 수 있는 용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잠시 잠들었다가 다시 새벽같이 일어나 회사로 향하는 날이 반복되었습니다. 술냄새를 풍기는 오전의 사무실 풍경은 마치 전날 밤 함께 큰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전사들처럼 '전우애'로 넘쳐났습니다. 업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팀장'님은 업무 하는 것보다 큰 전쟁을 다 같이 치르고 온 것에 대한 팀의 뭉침. 의리. 그리고 그렇게 이끌었던 본인의 리더십에 취해 오히려 격려하는 기색이었습니다.
팀장님은 이런 것이 회사 생활이다. (대체 어떤 게?) 술을 못 마시면 지는 거다 (누구 한데?) 여자라고 봐주는 거 없다 (누가 봐달랬나?) 잘할 수 있겠니?(업무는 언제 시켜주나요?) 라며 도통 앞뒤 논리가 안 맞는 말로 저를 설득(?)하려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적당히 하고 그만두라고...
당시 해외영업 직군에 서무 직원들을 제외하고 대졸 공채 여자라곤 저를 포함하여 2명이었습니다. 당시 팀장님은 여자 직원을 처음 받아본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렇지만 다 같이 노력해 보자고 하셨습니다.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저는 '군대 문화'이긴 하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시긴 하지만, 여자 동료가 없긴 하지만, 잘 해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습니다.
팀장님은 드디어 저에게 '업무'를 지시하셨습니다. 아침에 신문을 가져올 것. 아침 8시, 점심 13시에 팀장님 자리에 커피를 타다 놓을 것. 그리고 '설비 수출' 업무를 맡을 것.
서무 언니가 그동안 힘들게 하던 일을 저에게 지시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서무 언니가 편할 수 있다면야.. 그리고 내가 회사 막내니 내가 커피 타야지.. 본제품 수출 업무는 아니지만 설비 수출도 수출이니 열심히 하다 보면 나도 다른 남자 선배들처럼 국가를 맡아 해외 비즈니스 사업을 담당할 수 있겠지..라고 순수한 '긍정'으로 6개월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6개월 뒤에 드디어 '후배'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제가 맡아서 하던 업무인 신문 배달/커피 타기/설비 수출 업무를 후배에게 업무 인수인계해주었습니다. 후배는 곧 잘 따라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가 지나 팀장님이 조용히 저를 부르더군요. '신문 배달/커피 타기/설비 수출 업무'는 네가 계속해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일을 남자한테 시키면 어떡하냐. 저는 뒤통수를 크게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첫 후배는 '남자'였었죠. 팀장님은 그동안 저에게 시킨 일이 '여자'이기 때문에 시킨 것이었지 '막내'여서 시킨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당시 꽤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팀장님에게 제 의견을 얘기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팀의 막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허드렛일을 솔선수범했었던 거지, 여자이기 때문에 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자라서 해야 한다고 하시면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6개월도 지났으니 국가 업무를 하고 싶습니다." 고분고분 하게 말 잘 듣던 "여자"직원이 따박따박 따지는 모습에 흠칫 놀라시며, "역시 여자들은 이래서 안돼. 너무 감정적이야." 이렇게 일하고 싶다고 얘기하는 직원에게 그렇게 밖에 얘기할 수 없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누가 더 감정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팀장님은 2년 후 권고사직으로 회사를 나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글로벌 시대에 저런 마인드를 가진 리더가 오래 회사 안에서 자리 잡고 있기는 힘들었겠구나 싶습니다. 덕분에 남자 상사들이 나를 '후배'로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나만의 회사 생활 '전략'을 세우게 되었으니 '못난 팀장' 만난 것도 나름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면 너무 '기승전 깨달음' 화법일까요.
사원 내내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언제까지 회사 다닐 거야?" 나름 깨어있다고 생각했던 남자 선배들도 언뜻언뜻 이 말을 물어볼 때 정말 대답하기도 싫었던 것 같습니다. "선배님보다 오래 다닐 거예요." "정년퇴직할 때까지 다닐 거예요"라고 오히려 더 강하게 얘기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이 남자 선배들이 경험했던 여자 동료들은 회사를 다니다가 결혼과 함께 그만두는 분들이 다수였겠죠. 엄마세대도 그러했겠고, 본인 세대(60~70년대생)들도 그러했겠죠. 그렇지만 시대가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분들은 마치 '얼음'에 갇혀 있는 것처럼 옛날 세대를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손가락 톡 대고 '땡'하고 싶었지만, 가치관, 사고라는 것이 그렇게 순간 깨어나는 것이 아니니 부질없는 짓이죠. 저는 그때부터 '오래오래 회사 다니기'의 목표가 세워진 것 같습니다. 다들 인생의 목표와 방식이 다른 것처럼, 여자라고 해서 혹은 남자라고 해서 회사를 오래 다니거나 짧게 다니거나 정해진 방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개인의 차가 있을 뿐. 이 차이를 성별로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사적 모임에서 '여자들은 잘못했을 때 나무라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술 한잔 하면서 풀 수도 없고 이래저래 같이 일하기 힘들다'라고 아는 지인이 그러더군요. 더 나아가 '어차피 높이 올라가는 것은 남자잖아. 남자가 가장이니, 남자가 짊어지고 있는 무게가 얼마나 큰데.' 이 지인은 모기업의 나름 촉망받는 관리자로 명석함과 트렌디함으로 기대가 되는 리더분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사람마다 다르겠죠."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하나 반박하기엔 좋은 자리의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성이면 막 대할 수 있어서 편하고, 여성이면 조심스러워서 불편하다는 것은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회사는 학교처럼 가르치고 나무라고는 곳도 아니고, 동아리처럼 술 한잔 하면서 푸는 그런 사적 집단이 아닙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지적하고, 잘한 것은 보상하고 프로페셔널리즘을 기본으로 대하면 되는데, 여자라서 남자라서 일하는 방식이 어렵다면 그 리더십부터 한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홍콩에 출장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파트너사의 리더인 그는 최근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본다며, '미생'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말 한국 기업에서는 '안영이'처럼 여자 직원을 무시하는가?"라고 질문을 했고 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물론 드라마 '안영이' 설정은 현실보다는 과장되게 그려졌겠지만, 과연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나?라고 순간 멈칫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역상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미생'에서의 '안영이'를 보며 참 많이 공감했었던 것 같습니다. 무역상사와 비슷한 수출 업무를 하기에 드라마 곳곳 나오는 사업 이야기, 업무 이야기도 매우 흥미진진했고, 홀로 여직원으로서 남자 선배들의 '불인정' '괴롭힘'도 눈물 없인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성'을 가지고 '쫄지 않고 버텨나가는 회사 생활'까지 너무나도 비슷해서 어떤 회에서는 작가가 내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 홍콩 파트너에게는 '예전에는 그런 점이 많았는데, 점차 나아지고 있다. 봐라. 여자인 내가 너의 파트너 대표로 왔지 않느냐."라고 대답했습니다.
해외영업 일을 12년째 하면서 아직도 '여자'이기에 '인정'받지 못하고 평가절하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이제 '내가 너의 파트너 대표이다'라고 당당히 대답하는 날이 왔습니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버티고 이만큼 성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