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써니현 Aug 13. 2024

엄마가 할머니가 되면 좋을 줄만 알았다.

철딱서니 없던 엄마와 철딱서니 없는 딸의 이야기


어릴 적 엄마가 빨리 늙어 할머니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엄마가 할머니가 되면 지독한 방황을 멈추고 평범한 엄마의 모습으로 변해줄 것 같았다.

당시 눈에 비친 노인의 모습은 어린 손주들을 돌보며 행복하고 편안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조용하지만 충실히 사는 듯 보였고 엄마도 그래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엄마도 빨리 노인이 되어 다른 평범한 할머니들처럼 살기를 바랐다.

엄마가 노인이 되어 젊음의 활력과 건강을 잃는다 해도 평온한 일상을 살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된다면 술 마실 기운도 없을 테니 의미 없는 술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웃고 떠들며 술판을 벌이는 일도, 더 이상 술에 취해 술주정하는 모습도 없을 테고 옷차림새도 튀지 않고 여느 평범한 노인들처럼 바뀔 것 같았다.


어린 내 눈에 엄마의 발끝은 현실에 닿아 있지 못하고 붕 뜬 채 공중을 부유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뒹구는 가을 낙엽처럼 엄마의 삶은 비틀거렸다.

제 멋대로 불어댄 바람은 엄마 삶을 흔들어 댔고 엄마는 이성적 사고 능력은 애초 없었던 사람처럼 오로지 감정의 흐름에 자신의 삶을 맡겼다. 그렇게 공중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던 엄마의 모습은 늘 위태로웠다.


이제 엄마는 어릴 적 내 바람대로 75세 노인이 되었다.

엄마의 방황은 내 기대와 달리 60대 중반까지 지속되었지만 지금은 어릴 적 내가 생각했던 노인의 모습에 가장 근접한 삶을 살고 있다. 젊은 시절 건강을 돌보지 않은 탓이겠지만 여느 노인들처럼 기력도 쇠해 더 이상 방황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또 인생 총량의 법칙에 따라 평생 마실 술을 젊을 때 이미 다 마셨고, 평생 놀 수 있는 기운도 남김없이 다 써버린 것 같다.


지금은 그 좋아하던 술도 마시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으니 주변 친구들도 자연히 술을 마시지 않는 유흥과는 거리가 먼 친구들로 교체되었고 노인정에서 어디 놀러 간다 해도 고생만 한다며 시큰둥해 한다.


변화된 엄마의 모습을 보면 세월이기는 장사 없다는 말이 딱이다.

엄마는 이제 의미 없는 술친구들과 어울리며 감정을 소모하는 일도, 괴로운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술에 기대어 세월을 보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엄마의 집착하는 기질은 여전하다. 다만 지금은 유흥과 관계가 아닌 '돈' 모으기에 목표를 두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노인 일자리에서는 반장 역할을 맡아 구청 공무원들의 신임을 얻고 있고, 노인정 청소일도 도맡아 용돈벌이를 하고 있다. 집에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느니 운동 삼아 일하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라는 게 엄마의 신념이다.


엄마가 노년기에 접어들어까지 지독하게 돈을 모으는 이유는 딱 하나다.

당신이 부모에게 받은 재산이 없어 고생스럽고 서러웠던 기억과 함께 어릴 적 딸들을 살뜰히 챙겨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자신이 떠난 후 딸들에게 조금의 돈이라도 남겨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엄마는 벌써 우리 딸 셋에게 재산 분배를 하고 있다. 많지 않은 돈이지만 엄마에게는 평생 입지도 먹지도 않고 고생하며 한 푼 한 푼 모은 재산이다.

지금 엄마가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는 이미 동생 명의로 했고, 내게는 시골집을 증여해 주겠다고 했고, 시골에 있는 작은 땅과 지금 모으고 있는 현금은 언니에게 주겠다고 공언해 둔 상태다.

엄마에게 돈이 가진 의미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는데도 엄마는 그 생명줄을 자신의 분신인 딸들에게 맡겨두었다. 그만큼 엄마가 우리를 신뢰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한편 엄마 역시 세월을 이기지 못해 약해진 탓이리라.


얼마 전 엄마를 모시고 자매들과 조용한 시골 리조트를 예약해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멀미로 차를 타기 힘들어하는 엄마를 위해 이동거리를 고려해 인근 충북 제천으로 여행지를 정했다.

엄마는 더위에 힘들다며 처음에는 여행을 거절했지만 에어컨 빵빵한 숙소에서 하루 푹 쉬고 오자는 딸들의 설득에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엄마는 그런 분이다. 한 번의 설득으로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비싸게 군다.

엄마도 꼭 함께 가고 싶다는 정성 어린 딸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움직이는데 그런 엄마에게 우리 자매들은 모두 익숙해져 있다. 평생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기 때문에 엄마의 고집에 무력해져 굳이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는다. 그나마 최근 들어 자식들의 설득에 못 이기는 척 응하는 것도 나이 들어 생긴 변화라면 변화다.


엄마는 여행지로 향하는 차 안에서 피곤한지 내내 잠을 잤다.

숙소에 도착해서도 침대에서 누워만 계셨다. 그런 엄마가 안쓰러워 리조트 내 노래방을 갔지만 노래방에서도 몇 곡 부른 후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결국 의자에 누웠다.

엄마가 여행동안 가장 즐거워한 순간은 노래방에서 놀았던 순간도, 좋은 경치를 본 순간도 아닌 딸들과 오손도손 모여 앉아 수다를 떨었던 시간이었다. 이런 엄마에게 여행지가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어릴 적 상상했던 할머니가 된 엄마의 모습이 담긴 시나리오에 이런 모습은 없었다.

이제는 이런 엄마의 변화가 반갑지 않다. 반갑기는커녕 엄마의 주름진 얼굴과 아픈 몸을 생각하면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란 생각에 우울해진다.

이제 중년에 이른 나이지만 아직도 엄마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엄마는 영원한 내 편으로 수다 떨고 싶을 때 가장 만만하게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이자 언제든 찾아가도 버선발로 나와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다. 또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엄마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엄마를 사랑하는 딸들 옆에서 지금처럼 큰 소리 떵떵 치며 평생 하셨던 것처럼 엄마 마음대로 휘두르며 사셨으면 좋겠다.





이전 25화 엄마, 나, 딸! 삼대에 걸친 업그레이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