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아픔을 제대로 경험했더니 감사가 채워졌다.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동기 선생님으로부터 무거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사부님께서 급작스런 질환으로 위독하시다는 소식이었다. 두 분 다 정년퇴임 후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계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황망한 소식에 어안이 벙벙했다.
반려자이기 전에 세상에서 가장 절친한 친구 셨을 텐데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이별을 앞두게 된 선생님의 심정이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내가 겪은 이별의 고통에 기반해 얄팍하게나마 공감할 뿐이지만 잠깐의 공감만으로도 심장이 베이 듯 아픈데 어떻게 위로를 드려야 할지 그저 막막하다.
씩씩이 투병 블로그를 통해 키우던 반려견이 씩씩이와 같은 방광암을 앓고 있다며 연락을 해온 분들이 몇 분 계셨다. 그중 한 분도 1여 년의 투병 끝에 결국 반려견을 떠나보냈고, 문자로 나마 위로의 마음을 전했었다.
그러다 sns 프로필 사진에 건강했던 모습의 떠나간 아가 사진이 올라온 걸 보고 다시 안부 문자를 남기며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그분도 반려견이 떠난 지 49일째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이별의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 역시 씩씩이가 떠난 지 7개월이 넘어 평온한 일상을 사는 듯 하지만 아직도 녀석의 사진을 볼 때마다 눈물을 훔치고 있으니 백분 이해가 되었다. 그저 시간의 힘을 믿고 잘 버티어 보자며 서로를 위로했다.
지근거리에서 죽음을 경험할 때마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떨어질 수 없는 인간사의 쓰라린 양면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깊이 새기게 된다.
죽음이 생각보다 너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왠지 모를 마음속 조급함이 몰려와 평소 잊고 지내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대로서는 뜬금없는 연락을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빠르게 흐름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선 출생의 기쁨으로 탄성을 지르지만 반대편에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별의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세상에 태어난 생명체 중 죽음의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없으므로 삶과 죽음은 지극히 당연한 자연의 이치일진대 당사자로서 출생의 고통은 기억할 수 없지만 죽음의 고통은 너무나 극명하게 겪어내야만 한다.
예전에 주일 미사를 보던 중 신부님께서 죽음을 앞둔 수녀님에 관한 이야기를 강론 말씀으로 해주신 적이 있다. 임종을 앞둔 수녀님의 병문안을 다녀왔는데 수녀님께서 죽음에 관한 두려움을 호소하셨다고 했다. 평생 하느님을 섬긴 수도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해 낸 수녀님도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 공포를 느끼고 계셨다는 이야기는 수도자이기 이전에 나약한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이겠다 싶었다. 누구나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은 통증이라는 거대한 변수와 싸워야 하기에 몸도, 마음도, 단단했던 신앙적 신념도 나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의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을 앞두고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이별 후 고통의 시간을 잘 견디기 위한 비책은 없다. 또 다른 세상적 자극으로 시선을 돌림으로써 잠시 고통을 회피할 수는 있어도 완벽한 회피로는 없다.
그저 아픔을 온전히 껴안아 충분히 아파하다 보면 시간에 힘입어 조금씩 무뎌질 테고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침묵 속에 기다릴 뿐이다.
또 죽음이라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 조금씩 걸어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끊임없이 감사함을 찾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감사함이라는 빛을 바라보며 현재를 살다가 죽음의 순간마저도 감사할 수 있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지구에서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갈 수 있어 참으로 감사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