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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현 Apr 11. 2024

엄마와 머리카락

엄마와 나, 그리고 머리카락의 연결고리

엄마는 재주가 많다.

어릴 때 집 앞 담벼락에 다양한 색깔의 페인트를 이용해 예쁜 꽃들을 그려놓는가 하면 창호지 문에는 창호지 사이에 꽃잎이나 잎사귀를 넣어 예쁘게 장식하기도 했다. 그림에 소질이 있어 국민학교 때 학교 대표로 미술대회에 출전 기회도 주어졌지만 집에서 버스비를 받지 못해 대회를 못 나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어릴 때 레이스가 달린 꽃무늬 원피스를 자주 입었는데 엄마가 천을 떠다가 재봉틀로 직접 만들어 주신 옷들이었다.


이렇게 손재주가 있었던 엄마가 마지막으로 생계를 위해 선택한 직업은 미용일이었다.

우리 집은 엄마가 미용일을 하면서 경제적 곤궁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엄마는 시골 읍내에서 미용실을 몇 년 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일명 '야매 미용실'로 전환하면서 미용실로 오던 손님들이 집으로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시골 버스터미널에서 지근거리였고 인심 좋게점심때가 되면 손님들에게 잔치국수를 대접했다. 무엇보다 엄마의 영업 전략인 박리다매가 통했다. 엄마가 부른 미용 가격은 일반 미용실 가격에 비해 턱없이 저렴했다. 게다가 파마손님에 한해서는 방문 커트 1회가 공짜였다.


그렇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우리 집 '야매 미용실'은 시골 아줌마들이 장날이면 꼭 거쳐야 하는 성지가 되었다. 읍내 시골장이 서는 날이면 장을 한가득 보고 우리 집에 와서 점심으로 맛난 국수를 먹고 엄마의 현란한 손기술로 탄생한 '꼬불꼬불' 파마를 하고 갔다. 어린 내 눈에 엄마표 꼬불 파마는 촌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손님들은 아주 파마가 잘 나왔다며 만족하며 가셨다. 아줌마들이 말하는 파마가 잘 나왔다는 기준은 꼬불거림이 심하게 완벽해서 파마가 오래가 한동안은 돈 나갈 일이 없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방학 때면 우리는 마땅히 놀러 갈 곳도 없어 작은 방에 옹기종기 모인 손님들 틈에 끼여 아줌마들의 시끌벅적 수다와 엄마의 신세한탄 레퍼토리를 백색소음처럼 듣곤 했다.


엄마가 손님들에게 차려낸 잔치국수는 정말 맛있었다.

그럴듯한 고명 하나 올려진 것 없었지만 진한 멸치 육수 국물에 말은(이외에도 고향의 조미료는 필수) 잔치국수는 시원하고 아삭한 엄마표 배추김치와 함께 먹으면 시장이 반찬이던 시골 손님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고도 남을 만큼 맛이 있어 금세 동이 나기 일쑤였다.


엄마는 진짜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만큼 정신없이 바빴다.

혼자 손님들 파마를 말고, 중화제를 칠하고 파마가 끝나면 가위로 머리 손질을 하고 손질한 머리카락을 청소하고 점심때가 되면 국수 끓이러 주방까지 왔다 갔다 하며 종횡무진이었다. 그러다 나와 동생이 중학생이 되면서 바쁜 엄마를 대신해 파마중화제를 칠하거나 롯드를 풀어주는 일을 도우며 일손을 보탰다.


요새 아이들은 부모의 직장생활을 멀리서도 볼 기회가 없지만 나는 엄마의 고달픈 직장생활을 코앞에서 늘 보아온 셈이다. 엄마는 정말 살아있는 '가위손'이었다. 평생 해온 미용의 고단함으로 양쪽 손목에 손목터널증후군이 생겨 10여 년 전에 수술을 받기도 했다.


또 우리 집은 서비스직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감정노동의 생생한 현장이기도 했다.

가끔씩 까탈스러운 손님을 응대할 때면 엄마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식히며 참아 내는 게 어린 내 눈에도 다 보였다. 평소 보아온 엄마 성격이라면 욱해서 잔치국수 상을 뒤집어엎고도 남았을 텐데 돈을 벌기 위해 참아내는 엄마를 보며 신기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 집은 매일 파마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야매 미용실' 문전성시 역사는 시골 터미널이 집에서 한참 떨어진 기차역 인근으로 이전하면서 서서히 막을 내렸다.


여하튼 엄마의 생계 현장이 집인 덕분에 우리 집은 늘 손님들의 '머리카락' 천지였다.

아무리 빗자루로 쓸어 담아도 머리카락은 빗자루의 정전기에 힘입어 방바닥 장판에 딱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주인과 이별한 머리카락들은 내가 먹는 밥에서도, 국에서도, 반찬에서도 수시로 출몰했다. 옷에도 붙어 가시처럼 피부를 찔러대는 통에  여기저기 수시로 몸을 긁어댔다.


이 놈의 머리카락으로 인해 가장 스트레스받았던 시간은 다름 아닌 '점심시간'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각자 싸 온 반찬을 가운데 모아 두고 왁자지껄 밥을 먹었고, 그때마다 나는 내 도시락 반찬에서 머리카락이 나올까 노심초사하며 가슴을 졸였다. 입은 오물 걸렸지만 눈은 온통 도시락 반찬에 가 있었다. 혹시 머리카락이 반찬에서 보일라치면 친구들이 알아채기 전에 얼른 머리카락을 반찬과 함께 젓가락질해 내 입안으로 넣어 버렸다. 아무렇지 않게 머리카락을 손으로 건져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내 반찬에 머리카락 든 것이 들통날게 뻔해 어쩔 수 없는 차악의 선택이었다.(사람의 위장 기능은 실로 엄청나다. 내가 삼킨 머리카락들은 지금까지 어떤 질병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나는 바닥에 머리카락이 떨어진 꼴을 못 보고 있다.

주인과 이별한 머리카락은 당장 쓰레기통 행이 마땅하다. 퇴근해 집에 가서 제일 먼저 하는 일도 청소기 돌리는 일이다. 욕실에서도 샤워 후 마지막 루틴은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과 배수구에 걸린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정리하는 일이다.


나에게 머리카락은 생존의 위협에 놓였던 시골 모녀 가정을 살려준 은인이기도 하고, 예민했던 어린 시절을 더욱 예민하게 했던 원수(?)이기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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