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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현 Apr 11. 2024

엄마와 공짜 운동화

공짜 운동화의 덫

힘들어 죽고 싶다고 온몸으로 외쳤던 엄마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국민학교 3학년 시절로 기억한다.

당시 종례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집안 형편이 가난한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운동화를 지급할 거란 말과 함께 내일 가정형편을 조사한다고 했다.(그때는 별 걸 다 조사하던 시기였다)  

나는 운동화 지급의 전제 조건이었던 '가난'이라는 단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운동화'라는 단어와 그것도 공짜라는 것에 꽂혀 엄마에게 달려가 기쁜 소식을 전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우리 딸 셋을 앉혀두고 내일 학교 가면 꼭 가난하다고 손을 번쩍 들어서 운동화를 받아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어린 딸들이 학교에서 받을 상처 따위는 가난의 위협에 질려있던 엄마에게는 안중에 없었다.


난 엄마가 어떻게든 힘을 내 최소한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키워줬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다음날 '우리 집 가난해요' 라며 부끄러움도 잊은 채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런데 당시 반에서 손을 든 친구는 내가 유일했다.(나도 나만 손을 들 줄 몰랐다. 1980년대 시골살림은 대부분 가난했으므로)


그날의 일이 가져올 후폭풍은 미처 생각지 못한 채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새햐얀 운동화를 받아 들고 마냥 신이 났다. 새 신발을 신는다는 기쁨보다 신발 구입비를 절약하게 되어 기뻐할 엄마 얼굴을 떠올리며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냥 집에 들어섰다.


그런데....

엄마의 매서운 당부에도 언니와 동생은 가난한 집 딸임을 자처한 나와 달리 손을 들지 않았고 운동화는 유일하게 나만 받아왔다. 지금도 그때 일을 회상하며 언니와 동생한테 왜 손들지 않았냐고 물으면 가난한게 뭔 자랑이라고 손을 드냐며 창피해서 손을 안 들었단다.(당연한 질문을 왜 하냐는 핀잔과 함께)


나는 참 바보 같다.

당시 나도 '가난'이 자랑스러운 건 아니었다. 다만 부끄러움보다, 가난이 엄마의 삶을 접게 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과 공포의 마음이 더 컸다.


여하튼 그렇게 손에 쥔 운동화는 밑창이 떨어져 빗물이 새어들 때까지 신었다.


그날 이후 나는 반 친구들에게 '가난한 집 아이'라는 보이지 않는 낙인이 생겼다.

요즘처럼 대놓고 왕따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의 은밀한 멸시의 눈초리를 간간히 느낄 수 있었다.


한 번은 수업이 모두 끝나고 청소시간이 되었는데도 옆자리 친구가 오지 않아, 친구의 책상 위 노트와 필통을 정리해 가방을 싸준 적이 있었다. 뒤늦게 돌아온 친구는 자기 필통 안에 비싼 연필이 없어졌다며 나를 의심했다.(지금도 이 사건이 기억에 남은 걸 보면 트라우마란 이런 거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을 위축된 채 보냈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사춘기 변화와 맞물려 더 소심하고 주눅 든 채 보냈던 것 같다. 신발을 얻기 위해 지불했던 가난 딱지는 어느새 어린 시절의 내 상징이 되어 버렸고 예민한 사춘기 아이의 마음을 우울로 잠식해 버렸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모색한 돌파구는 '공부'였다.

엄마는 늘 말했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건 공부를 많이 못해서야. 공부 열심히 해라'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달리 성적표에 등수가 표기되었고 공부를 잘하면 선생님의 호의를 사는 건 물론이고 친구들도 대놓고 무시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변변한 참고서 하나 없었던 내게 공부도 쉽지 않았다. 최상위권 친구들만 눈에 띌 뿐 나처럼 애매한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또 아무리 모범생 코스프레를 한다 해도 이미 알려진 '가난한 집 아이'에게 선뜻 다가와줄 친구는 없었다.


요란스럽게 방황하던 엄마와 맞짱 뜨며 더한 방황으로 반항하며 엇나갈 수 있었던 나의 사춘기 시절!

하지만 나는 엄마의 방황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족했다.(일명 간접경험 학습의 효과)

당장 굶어 죽어도 외갓집에 절대 손을 벌리지 않았던 엄마의 자존심을 똑 닮은 나는 엄마처럼은 절대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정서적 풍요로움이  주는 여유 속에서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눈빛이 반짝이는 아이들도 있지만 반대로 어린 나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의 무게와 무기력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아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이 대체로 보건실 단골손님이 되곤 한다.


나는 그런 아이들의 눈빛에서 사랑과 관심이 고팠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 한다.

아이들의 동그란 눈은 슬픔과 두려움으로 일렁인다.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 어느새 훌쩍 자라난 몸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여리고 아픈 속살을 감추고 보호하려 자신만의 단단한 방어기제를 두 겹, 세 겹 덧대기 시작한다. 이 아이들이 성장해 자신이 쌓은 두터운 방어기제의 벽을 허물고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내면 자아를 만나기까지 얼마나 고뇌하며 고단한 성찰의 시기를 거쳐야햘까.


이 아이들은 어떤 운명의 굴레를 받아 든 걸까.

 어린 시절과 닮은 아이들이 한없이 안쓰럽다.


나는 오늘도 교실 허공에 대고 진심을 꾹 눌러 담아 이야기한다.

"얘들아, 환경이 힘들다고 절대 포기하지 마, 포기만 않는다면 뭐든 할 수 있어."

"꿈은 무조건 크게 가져. 그래야 그 언저리라도 도달할 수 있어. 너희들의 꿈에 한계를 두지 마"

단 한 명이라도, 허공에 떠다니는 내 이야기를 마음채에 담아 간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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