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써니현 Apr 11. 2024

엄마를 기어코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딸

엄마와 나! 그리고 애증의 연결고리

나는 기본적으로 엄마를 너무 사랑한다.

엄마는 웃음도 많고 유머감각도, 인정도, 흥도 많다. 또 화통한 성격 탓에 아파트 노인정에서 인기도 많다. 엄마의 친화력은 엄청나다.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고 지금 살고 계신 동네에서도 엄마 집은 제2의 노인정이라 불려도 될 만큼 동네 할머니들의 아지트다.(예전 살던 집에서 엄마집은 주막으로 통했음) 평생 업으로 삼은 미용일로 손목터널증후군이 생겨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하루도 안되어 병실 환자들과 친해지는 모습을 보고 놀란적이 있다. 엄마는 한마디로 요새 말로 '인싸'기질이 충만하다. 지금은 체력이 안되어 힘들지만 예전에는 놀 수 있는 곳이라면 절대 빠지는 법이 없었다. 동네에서 관광이라도 가는 날은 남들 다 자는 새벽 3시부터 혼자 기상해 화장하고 머리에 헤어롤(일명 구르프)을 말고 옷까지 딱 세팅을 마친다. 그런 다음 출발 시간까지 한참이 남았음을 깨닫고 왜 이리 늦게 출발하냐고 투덜대다 지루해하다 혼자 온갖 설레발을 치셨다. 나 역시 새벽부터 켜진 불에, 또 엄마의 머리를 달궈주던 드라이기 소리에 이른 새벽부터 잠에서 깨어 관광 간다고 새벽부터 신이 나있는 엄마가 볼수록 신기해 이불속에서 뭉그적대며 한참을 바라봤다.


이런 엄마와 달리 나는 낯을 가리고, 여럿이 시끌벅적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사색하는 걸 좋아하고, 유흥을 좋아하지도 않고 낯선 곳으로 여행하는 것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한마디로 엄마와 나는 정말 다르다.

나는 가끔씩 내가 엄마 뱃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신기할 때가 있다. 3살 때 아빠가 돌아가시고 아빠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보니 막연하게 엄마랑 다른 부분은 아빠를 닮았겠거니 추론만 할 뿐이다.


여하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엄마의 지독한 방황으로 우리 딸 셋은 성장하면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아빠의 부재로 혼자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던 엄마는 막중한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고 망각의 묘약인 술의 세계로 도피했다. 술과 유흥은 엄마가 놓인 지옥 같은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을 것이다.

아빠뿐 아니라 엄마까지 부재중인 날이 많았던 세 자매는 어른의 보살핌 없이 우리끼리 보호자가 되어 자랐다. 지금도 어린 시절의 이야기만 나오면 중년이 다 되어가는 머리 희끗해진 딸들은 엄마에게 날카로운 원망의 화살을 쏘아대고 엄마는 그에 질세라 내가 얼마나 고생하며 너희를 키웠는데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으로 응수하신다. 그나마 요즘은 연세가 드셔서인지 지난날의 과오를 한 번씩 인정하는 발언을 해 놀라기도 한다.


돌이켜 생각하면 엄마도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엄마를 지지해 주는 든든한 부모를 만났다면, 또 안정된 직업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방황하지 않았을 테다.


난 딸로서는 죽을 때까지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여자로서 엄마의 삶은 십분 이해한다. 

고작 30살의 촌부가 하루아침에 과부가 되어 한참 키워야 하는 고만고만한 딸 셋을 두고 차가운 생계의 현장으로 내몰린 현실에 제정신이면 오히려 이상할 노릇일 테다. 또 젊디 젊은 여자가 얼마나 외로웠을 것이며, 얼마나 유혹이 많았겠는가.


엄마에 관한 글을 쓰는 것도 어떻게든 엄마를 이해하고 기어코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내 굳은 의지의 표현이다.

그만큼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에 대한 나의 사랑을 표현하자면, 엄마는 선천적으로 삼각형으로 태어났고 나는 사각형으로 태어났다. 네모 모양으로 세상을 보는 사각형인 나는 삼각형으로 세상을 보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내 사각형의 꼴을 넓혀 아예 삼각형을 품어버린다면 애써 이해하려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자식으로서 이제껏 고생하며 키워주신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자책할 필요도 없다.


차라리 엄마의 삶을 온전히 껴안아 버리는 것이 엄마의 유전자를 받아 태어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또 엄마에 대한 원망의 인과관계에서 해탈해 어릴 적 상처로부터 간절히 벗어나고 싶다.  


어느덧 내 나이도 엄마가 한참 방황하던 나이대를 거쳐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어쩌면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엄마를 원망하고 있다는 건 나의 미숙함의 방증일 테다. 엄마가 살아냈던 그 세월을 살아보니 나 역시 부모 노릇, 사회구성원이 되어 먹고사는 것,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았다.


그나마 나는 건강만 하다면 일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엄마가 가장이 되어 돈을 벌던 70~80년대는 일자리 자체도 적었을뿐더러 많이 배우지 못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을 써야 하는 험한 일뿐이었다. 엄마를 거쳐갔던 직업만도 참 많다. 엄마는 그 시대 프리터족(freeter, 일용직 또는 비정규적인 알바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 직업만 해도 새벽에 했던 건물청소, 식당 설거지, 젓가락공장 생산직, 곤달걀 장사, 옷장사, 화장품 판매원, 칼국수, 주꾸미 식당 운영, 미용실 등이다. 이 중 그나마 오래 한 일이 화장품 판매와 미용실이어서 우리는 한때 동네 어른들에게 피어리스집(피어리스는 1957년 설립된 화장품 제조사) 딸들로 불렸다.


엄마는 참 신기하다. 

자식들 건사는 그렇다 쳐도 이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어떻게 술 마시고 놀 수 있는 기운이 있었나 모르겠다. 나는 직장에서 퇴근하고 돌아와 강아지 돌보고 딸 저녁 챙기고 집 정리 하고 나면 체력이 방전되어 어쩌다 생긴 친구들과의 약속도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로 일정을 잡는다. 또 친구들을 만나더라도 골골될 것이 두려워 밤 10시 이전에는 모임을 정리하고 집에 가는 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의 체력은 국가대표급이었다. 그래서인지 76세 연세에도 그 흔한 당뇨,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 하나 없으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