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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현 Apr 11. 2024

엄마는 그날도 술을 마셨다.

엄마와 나, 그리고 술의 연결고리

엄마는 마을 이장님과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매우 깍듯하게 인사를 하곤 했다.

이장님의 부인인 일명 '아라할머니'와도 평소 성격대로 아주 살갑게 잘 지내셨다. 엄마는 평소 마을 어른들에게도 잘하는 편이었다. 우리에게도 늘 아비 없어 커서 버릇없다는 소리 듣지 않도록 만나는 어른들마다 인사를 잘해야 한다고 일장연설을 하시곤 했다. 그것과 별개로 엄마가 아라할머니와 특별히 더 잘 지내야만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을 이장님이 해마다 동네 주민들 중 영세민(국민기초생활수급자)을 선별해 읍사무소에 보고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엄마는 매년 영세민 선발 시기가 되면 대상자에서 탈락할까 노심초사하며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지독한 가난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올해도 영세민으로 지정될 수 있게 선처해 달라고 하소연하곤 했다. 어느 날은 돌아가는 판세가 불안했던지 엄마는 이장님 댁에 닭이라도 한 마리 사다 드려야겠다면서 시장에서 패사한 닭을 사 와 이장님 댁에 보내셨다. 패사한 닭은 정상 유통과정을 거쳐 시장에 나온 닭보다 훨씬 저렴했기 때문에 가난했던 엄마는 아빠 제사 때나 긴히 로비가 필요할 때 종종 구매하곤 했다.




그해도 엄마의 각고의 노력 덕분에 우리 집은 '영세민'으로 지정되어 정부에서 제공하는 여러 혜택을 받았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쌀(정부미=농림축산식품부에서 기초수급자에 제공되던 쌀)과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비감면 혜택을 받은 것 같다. 영세민으로 지정되어 반색하던 엄마와 달리 나는 우리 집이 영세민이란 사실이 못내 부끄러웠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시끌벅적 떠들며 당시 서무실(행정실) 앞에 납부금을 내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설 때면 나는 그때마다 주뼛거리며 늘 맨 뒷줄에 서곤 했다. 내 납부금 고지서에 인쇄된 금액은 친구들이 내는 돈에 비해 훨씬 적었기 때문에 중간에 줄을 서게 되면 바로 뒤 친구에게 내가 영세민이란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사실 친구들은 아무도 내 납부금 고지서 용지에 인쇄된 금액이 얼마인지 관심도,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텐데 콩닥거리는 심장으로 잔뜩 움츠러든 나는 마치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내 납부금 고지서에 찍힌 금액만 훔쳐보는 것 같았다.  


다행히 우리 딸 셋은 성장하면서 크게 아프지 않았고 병원 갈 일은 생기지 않아 엄마가 죽으란 일은 생기기 않았다.


이장님이 갖다 준 정부미는 지척에 사셨던 외할머니 댁에서 먹었던 윤기가 좔좔 흐르던 탱클탱클 흰밥과는 달리 밥알에 힘이 없고 푸석푸석하니 영 맛이 없었다. 철없던 나는 우리 집 밥은 왜 이리 맛이 없냐고 엄마에게 묻곤 했다. 할머니 집은 직접 벼농사, 밭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추수철만 되면 쌀이 가마니로 쌓여 있고, 김장철에는 수확한 배추, 열무 등으로 대대적인 김장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도시에 사는 아들들 집으로 보내졌고 인근에서 지독한 가난에 허덕이며 조용한 비명을 지르고 있던 엄마에게까지 올 먹거리는 없었다.




엄마는 참 부모복이 없었다.

타고난 팔자가 부모복이 없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아 철저히 외면받았던 것인지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다. 엄마는 어릴 때뿐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까지 할머니에게 매를 많이 맞았다고 했다. 할머니의 매질은 엄마의 결혼 직전에서야 멈추었다고 하니 이전에도 엄마는 부모에게 그다지 사랑받았던 딸은 아녔겠다는 추측만 뿐이다.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과연 어떤 딸이었을까? 부모에게 자식이란 존재는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데 엄마손가락은 아무리 깨물어도 아프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엄마의 술문제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찍힐 대로 찍혀 미움을 받았던 것일까.


전후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엄마는 자신이 낳아 한참을 책임져야 할 어린 딸 셋 말고는 하늘 아래 철저히 혼자였다. 그렇게 어미새 바라보듯 자신만 바라보는 어린 딸 셋을 덩그러니 두고 엄마가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친부모에게도 기댈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자 엄마의 방황은 날로 심해졌고 그럴수록 엄마는 철저히 술에 의지했다.




그날도 엄마는 시골 구멍가게 툇마루에 옹기종기 모여 수다로 웃음꽃을 피우던 동네 아줌마들의 입방아 주인공으로 등극했을게 뻔하다. 내가 그 구멍가게 앞을 지나며 엄마가 가르친 대로 아빠 없이도 잘 큰 인사성 바른 아이가 되기 위해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한참 다른 집 숟가락 개수를 파악하기 위해 내밀한 정보를 나누다가도 누군가 눈에 띄면 그 집 이야기로 주제가 옮겨가기 마련인 것이 시골의 수다 현장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그날도 술에 취해 있었다.

그 장면을 함께 목격했을 언니와 동생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기억에 없다. 다만 평소 잘 웃고 다정했던 엄마가 일순간에 고주망태가 되어 내게 말을 거는 모습이 마치 만화 영화 속 어린 주인공을 위협하던 괴물로 비쳐 잔뜩 겁에 질렸던 내 감정만 기억날 뿐이다. 그렇게 술에 취해 눈이 풀려있던 엄마는 처연하게 우리를 바라보며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혼잣말과 함께 서러움과 분노의 눈물을 마구 쏟아내며 절규하듯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때 엄마가 토해낸 울음은 인간의 소리라기보다 최상위포식자를 목전에 두고 풍전등화에 놓여 위태로워진 목숨을 만천하에 알리고픈 애처로운 동물의 간절한 구조요청 같았다. 엄마는 그렇게 호수를 가득 메울 수 있을 만큼의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서야 기절하듯 큰 대자로 뻗어 잠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요란스러운 의식을 치른 후에야 잠이든 엄마의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잠자는 동안은 술을 마시지 않을 테고 뜬끔없이 갑자기 외출해 밤이 되어서도 들어오지 않는 엄마를 걱정하며 한없이 기다릴 일도 없이 그대로 밝은 아침을 맞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술독이 온 장기를 자극하는 듯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어도 그 소리조차 엄마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그럼 된 것이었다. 엄마가 잠이든 시간은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에나 볼 수 있는 고요한 정적을 맛보는 시간이었다. 세상은 폐허로 변했을지언정 태풍 직전의 카오스 상태는 말끔히 정리되어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는(엄마의 코골이 소리를 제외하고) 고요한 평화가 나를 둘러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평화는 세상이 뒤집어졌어도(엄마는 당시 내 세상이었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안도감이었을지 모르겠다.


그 시간이라도 엄마가 자신을 옥죄던 무자비한 운명의 횡포에서 벗어나 아빠와 함께 살던 행복한 한때는 아니더라도 망각이 지배하는 무의 세계로 피신해 깊은 휴식을 취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아침을 맞으면 엄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본인이 저지른 술상의 흔적을 씩씩하게 치우셨다.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는 하얀 거짓말과 함께!




엄마의 영향 때문인지 성인이 된 나는, 더 정확히는 40대 중반 이전까지 술을 마시지 않았다.

20살 때 직장생활을 하며 술 마신 후 필름이 끊어진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너무 궁금해 호기심 삼아 손으로 코를 막고 처음으로 소주를 마셨던 기억을 끝으로 오랜 시간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다. 당시 회사 회식자리에서 소주 2병을 마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대체 맛도 없이 쓰기만 한 술을 엄마는 왜 그렇게 마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 속은 얼마나 울렁거리던지 집에 가서 이불에 그날 먹은 안주를 다 토해놔서 2살 어린 동생에게 온갖 욕을 다 들었다.(지금 생각해도 욕먹어도 싸다)

또 그다음 날 두통은 왜 그리 심하던지 누군가 망치로 머리에 못을 박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쓰기만 하고 맛도 없는 술을 엄마는 왜 그리 마셨던 걸까?

20살의 나는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술맛을 느껴보고 싶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유독 철이 없었던 나는

20살이 되어서도 엄마가 기호식품인 술을 유난히 좋아해서 그토록 많은 술을 마셨다고 생각했고 오랫동안 엄마를 원망하고 미워했다. 엄마의 애환을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지금도 가끔씩 엄마에게 젊을 적 왜 그렇게 술을 마셨냐고 핀잔 섞인 질문을 하면 엄마의 대답은 늘 한결같다. 술이라도 안 마셨음 엄마는 죽었을 거란다. 급작스런 사별 후 정신을 추스를 새도 없이 친할머니와의 긴 소송으로 멘털이 털릴대로 털린 상황에서 당장 배고파 울고 있는 자식들 먹일 끼니를 걱정해야 했을 당시의 젊은 엄마가 눈물 나도록 안쓰럽고 측은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자신이 놓인 지옥 같은 현실을 술이 주는 망각과 숙취가 주는 고통으로라도 잊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은 평상시 엄마는 명랑하고 쾌활했다. 

우스갯소리도 잘하고 다른 사람의 특징을 살려 흉내도 잘 내서 우리는 아침마다 밥상에 둘러앉아 엄마의 개그에 깔깔거리며 배꼽 잡고 웃곤 했다. 돌아보면 엄마가 죽지 않고 버티며 살 수 있었던 것은 태생이 밝은 성정 덕분인 듯싶다. 또 우리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삐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클 수 있었던 것도 엄마의 '유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도 우리는 웃음꽃을 피웠다.

또 냉혹한 현실에 개의치않고 한가닥 희망에 의지하며 꿈도 꿀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적도 없는 부모를(그것도 가난한) 만나 지지리 고생하며 산 것도 서러운데 꿈마저 가난한 필요는 없다.


꿈을 꾸는 데는 한 푼의 돈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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