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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현 May 10. 2024

엄마의 무한신뢰가 낳은 장수생 탈출

엄마와 나, 그리고 신뢰의 연결고리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늘 사람들로 복닥거렸다.

엄마가 야매 미용일을 시작하면서 시골 장터를 방불케 할 만큼 50대부터 80대 할머니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집으로 모여들었고, 머리 손님이 없을 때는 엄마의 술친구들로 붐볐다. 엄마는 나이 불문, 성별 불문하고 그냥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들 속에서 웃고 떠들며 스트레스를 풀고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이사간지 6년 만에 아파트 노인정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아 노인들끼리 싸움이라도 날라치면 시시비비를 가려주고 자칭 입바른 소리 하며 노인정 기강 잡이를 자처한다.


엄마가 즐겁게 사는 것이 자식으로서 뿌듯하지만 한편 사람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가 벌어질 것이 염려되어 다툼이 날 만한 사람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남의 일에 쓸데없이 나서거나 참견하지 말고, 식당에 가더라도 아무리 손녀뻘되는 나이 어린 직원이라도 절대 반말하면 안 다고 부모가 자식에게나 할 법한 잔소리로 엄마를 단속하고는 한다.




우리 집 야매 미용실의 주 고객은 젊고 세련된 여성들이 아닌 농사일로 손이 거칠어진 중년 여성들과 허리 굽은 할머니들이 대다수였다.

장날이면 우리 집은 시골 장터를 방불케 할 만큼 미어터졌다. 이렇게 손님들이 밀려들 때면 나는 방으로 피신해 뒹굴거렸다.


하지만 거침없이 쏟아지는 각양각색의 주문들로 동분서주하며 전쟁터 같은 상황이 되면 엄마 혼자 동동거릴 테니 마냥 뒹굴거려서는 안 된다. 특히 손님 머리를 만져주는 틈틈이 점심때에 맞춰 주방에서 국수를 끓여야 할 상황이 되면 알아서 눈치껏 구원투수가 되어 손님들의 마무리 손질(중화제 뿌리기, 롯드 풀기, 커트 후 머리카락 쓸기 등)을 돕거나 주방일을 거들어야 한다.


귀찮다는 핑계로 계속 방안에만 숨어있다 화장실이라도 가는 길에  엄마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다른 집 아이들은 밖으로 잘만 돌아다니는데 왜 집구석에만 틀어박혀 걸리적거리냐는 핀잔 섞인 잔소리와 함께 엄마의 짜증 폭탄을 맞아야 할지도 모른다. 엄마 말을 해석하자면 다 큰 딸년들이 이렇게 바쁠 때는 알아서 도와줘야지 방구석에서 놀고 있을 거면 차라리 밖에 나가 놀던지, 눈에 띄지나 말라는 뜻이었다.


당시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엄마가 혼이 반쯤 빠져 정신없이 일하는 것을 보면서도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엄마의 호출을 피해 도망 다니기 바빴다.




좁은 집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손님들은 차례를 기다리다 지루해지면 하나둘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고생스러운 농사일부터 돈벌이에는 도통 관심 없는 속 썩이는 남편 이야기, 시댁 험담, 공부 잘해 객지 나가 성공한 자식 자랑까지 인간사 전반에 걸쳐 아주 다양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이야기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가 인간극장 시리즈를 보는 것 같았다. 평범한 시골 아줌마들의 이야기는 어린 내가 들어도 재미있고 드라마틱하고 다이내믹하고 스펙터클 하기까지 했다.


나는 어른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으면서도 마치 못 들은 척. 안 들리는 척 딴청을 피우거나, 웃긴 이야기에는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연신 키득거렸다. 가끔씩 어린이 청취 불가 스토리가 나올 때면 세상 해맑은 얼굴로 더 딴청을 피우며 귀를 곤두세워 바짝 주파수를 맞추곤 했다.





그 생생한 수다 현장의 단연 으뜸은 파란만장한 엄마의 이야기였다. 

엄마는 더 이상 흉볼 남편도, 시댁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나간 세월의 앙금을 격정과 한탄을 오가며 시원하게 풀어냈다. 아줌마들은 연신 혀를 끌끌 차며 엄마의 시어머니(친할머니) 욕을 거들었고 사별 후 딸 셋을 혼자 키우느라 고생하는 엄마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신이 나 거침없이 손님들의 머리를 매만지며 더 거침없는 입담으로 마르지 않는 샘에서 연신 물을 길어 올리듯 이야깃거리를 쏟아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손님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공감이 담긴 추임새를 넣어 엄마의 고된 세월을 위로했다.


그러다 손님들이 하나둘 자식자랑을 시작하면 엄마는 이에 질세라 내 자랑을 했는데 사실 특별히 내세워 자랑할 만한 수준도 아닌 내용들이었다. 이미 자랑했던 내용을 재탕. 삼탕 하는 건 다반사였다.

엄마의 지론에 의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숫자를 부풀리는 정도의 거짓말은 양호한 것으로 거짓말 축에도 못 낀다고 했다. 예를 들어 내가 시험에서 80점을 받으면 90점을 받았다고 하고, 반에서 7등을 하면 4등을 했다는 식으로 꼭 조금씩 부풀려 자랑했는데 그럴 때면 당당한 엄마의 얼굴과는 달리 내 얼굴은 늘 화끈거렸다. 손님들이 떠나고 왜 쓸데없는 거짓말을 하느냐고 다그칠 때면 엄마는 그거나 그거나 무슨 차이냐며 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 뱃속에서 나온 내가 당신 자존감을 세워줄 유일한 지렛대였다는 것을....

엄마는 남편이 없다는, 가난하다는, 정식 미용실이 아닌 야매 미용실을 아슬아슬 외줄 타듯 불법 운영하고 있다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자존감을 채워 줄 유일한 유용 자원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느끼는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괜한 자존심의 발로는 아니었다.

어린 내 눈에도 엄마를 무시하는 듯한 동네 어른들의 언행이 가끔씩 보였고 그럴 때면 당당하게 따지지 못하는 엄마가 안타깝고 속상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찔금 나기도 했다.


엄마는 동네 사람들의 암묵적 침묵 속에 집에서 야매 미용업을 하고 있었고 동네 사람 누구라도 척을 지게 되는 날에는 자칫 불법 영업으로 신고당할까 늘 노심초사 두려워했다. 더구나 엄마와 한편이 되어 싸워줄 든든한 남편도 없는 터라 설혹 동네 사람들에게 불합리한 일을 당하더라고 돌아서 분한 마음을 삭혔다. 혼자 사는 여자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은근한 무시를 당하면서도 언제라도 익명의 신고자인해 야매 미용일을 접고 생계가 막막해질까 두려워 참고 또 참았다.




어릴 때 정말 싫어했던 동네 아줌마가 있었다.

그 아줌마의 남편은 동네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했고 술을 자주 마셔서인지 낯빛이 까맸다. 아줌마는 우리 집에 가끔씩 파마를 하러 왔다. 자칭 서울여자인 아줌마는 서울에서 시골로 시집을 왔다고 했고 세상 교양 있는 '척'하는 말투와 손짓으로 엄마를 내리 깔보며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잘난 척을 했다. 아줌마는 말끝마다 혼자 사는 여자를 폄하하고 무시하는 발언을 했지만 엄마는 시골 아줌마들 앞에서 보였던 당당함과 달리 아줌마와 대화할 때면 말을 얼버무리거나 말수가 줄었고 머리 해주는 내내 아줌마의 교만함과 잘난 척을 인내심을 동원해 들어주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그 아줌마의 남편도 간경화로 사망했다. 아줌마는 남편의 사망으로 자연스럽게 본인이 그토록 멸시하고 무시하던 '과부'가 되었다. 그 후 아줌마는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 친정으로 이사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신이 그토록 무시했던 과부가 된 것에 스스로 위축이 되어 동네에서 얼굴 들고 자신이 없었나 보다. 어린 마음에도 아줌마의 선택이 이해가 되었다.


누구나 나이 들어 배우자가 먼저 떠나면 과부나 홀아비가 되기 마련인데 당장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편협한 시선과 편견으로 상대를 깔보며 무시한 자의 말로가 참으로 딱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당장 내일 일 조차 장담할 수 없는 게 인간사임을 엄마를 무시했던 아줌마를 보고 알게 됐다.




나는 엄마의 기대에 어떻게든 부응해 기쁨을 주고 싶었다.

내가 아무리 고생한다 해도 엄마만큼의 고생은 아닐 테고 설령 고생한다 해도 결국 나 잘되려고 하는 고생이니 할 만했다. 결국 내가 잘되면 나도 좋고 엄마도 좋고 일석이조였다.




나는 임용시험 장수생이었다. 무려 4년 공부한 끝에 3번째 도전만에 합격했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딸을 위해 엄마는 내 딸을 1년간 맡아 키워주셨다. 딸의 안부를 물으려 전화할 때면 꼭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지부터 확인하며 학창 시절에도 안 하던 잔소리를 했다.


연신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지만 엄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자 마음먹었다.

엄마는 내가 불합격했을 때조차 나에 대한 무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우리 집에 뒷배가 없어 불합격한 것 같다며 내가 합격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합격하냐며 얼토당토않게 시험의 공정성까지 의심했다.


임용 시험 불합격보다 더 마음 아팠던 건 이런 엄마의 생각이 진심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임용 시험에 그런 뒷배는 통하지 않는다고 설교해 봐도 엄마의 나에 대한 믿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엄마는 불합격으로 좌절하는 내게 단 한 번도 내 실력이 부족함을,  내 노력이 부족했음을 탓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응원해 줄 뿐이었다.




엄마가 보내준 무조건적인 무한신뢰 덕분에 그나마 몸 건강하고, 내가 그만두지 않는 이상 잘릴 일 없는 안정된 직장에서 밥벌이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엄마. 손녀가 대학 졸업하면 용돈 더 올려드릴게요'

엄마 덕분에 이만큼 살고 있어요.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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