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족하게 못 먹고 자란 탓일 수도 있고 타고나길 식탐이 많아서 일수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 엄마의 지독한 방황을 지켜보며 나이 답지 않게 한껏 활성화된 '감정 뇌' 덕분일 수도 있겠다. 음식에 대한 기억은 음식을 먹었던 상황 그리고 당시의 감정까지 덧입혀져 한 세트로 뇌 기억회로에 깊이 새겨져 있다.
엄마와 음식으로 주제를 정하고 나니 엄마와연결된 강렬했던 추억의 음식 몇 가지가 떠올랐다.
1. oo맛살의 추억
- 정확하지는 않지만 국민학교 1, 2학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당시 oo맛살이 선풍적인 인기였다.
뭐 시골에서 제일 가난했던 우리 집도 먹어봤을 정도라면 선풍적인 인기가 맞을 것이다.
어느 날 엄마는 oo맛살이 너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엄마는 평소 먹는데 쓰는 돈조차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가 oo맛살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를 정도였다면 말 다 한 거다. 얼마나 맛있길래 상상조차 안되었지만 나도 그 맛이 궁금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평소 술을 자주 마셨던 엄마가 어디선가 공짜 술안주로 맛살을 먹어본 것 같다.
엄마는 결국 맛살이 너무 먹고 싶어 못 참겠다며 동네 슈퍼로 달려가 oo맛살을 사 오셨다.
우리 세 자매는 엄마손에 들려 있는 맛살에 일제히 집중했다. 게딱지 색깔처럼 은은한 붉은빛이 도는 겉표면을 가진 기다랗고 하얀 맛살은 귀한 음식답게 얇은 비닐로 하나하나 싸여있었다. 엄마는 맛살을 꺼내 딸들에게 공평하게 하나씩배급하고 먹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시범 보이며귀한 맛살을 한입에 바로 먹지 말고 여러 갈래로 얇게 찢어서 먹어 보라고 했다.
그렇게 맛살을 한 갈래 길게 찢어 한입 물은 순간 생소한 맛과 향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과자도 아닌 것이, 빵도 아닌 것이, 단맛도 아닌 것이, 말캉하고 짭조름한 꽂게 향의 식감에 심봉사 눈 뜨듯 번쩍 눈이 띄었다.
4명이 맛살을 하나씩 나누어 먹고 이제 남은 맛살의 개수는 딱 하나였다.
8개의 눈은 너나 할 것 없이 접시 위 탱탱하고 고고한 붉은빛이 도는 하나 남은 맛살로 향했다.
나는 하나만 먹고 말기에는 너무 감질맛이 나 아쉬웠다. 그렇다고 하나 남은 맛살을 먹겠다고 선언할 용기도 없었다. 눈치를 보니 엄마도 슈퍼에 가서 하나 더 사 올 생각은 없어 보였기에 가만히 엄마의 처분만 기다렸다.
그렇게 맛살을 사이에 두고 눈치를 보고 있는데 엄마가 한마디 하셨다.
'너네는 커서 맛있는 음식 많이 먹을 테니 하나 남은 건 엄마가 먹는다'
역시 엄마는 현명했다. 쩝.
2. 햄의 추억
- 국민학교 4학년 시절 바로 옆집에 살던 친구 순주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의 새언니(큰오빠와 터울이 커서 새언니가 있었음)가 부엌에서 요리를 하다 마당에 놀고 있던 친구와 내게 햄을 한 조각 건네주었다. 친구는 이미 먹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때 '햄'이란 음식을 먹기는 고사하고 처음 보았다. 연한 갈색빛이 도는 햄 한 조각을 손에 받아 들고 아무 생각 없이 한 입 베어 물었다.
한낮에 친구 집 부엌 앞마당에서 한 입 베어 물었던 햄맛은 실로 충격이었다. 쫄깃한 식감에 달콤 짭조름한 고기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나는 입안의 오감을 총동원할 태세로 정성스레 햄을 씹은 후 한참 후에나 아쉽게 삼켜냈다. 그리고 선명한 이빨 자국이 남은 햄 조각 한입은 겉옷 호주머니 안쪽에 고이 넣었다. 내 미각을 넘어 정신마저 홀려버린 이 햄을 엄마에게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바로 집으로 달려가 엄마에게 헐레벌떡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호주머니에서 햄을 꺼내어 먹어보라고 주었다. 햄을 맛본 엄마의 반응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태어나 처음 먹어본 햄의 충격적인 맛과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엄마 생각이 났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기특하고 신기할 따름이다.
3. 김치찌개의 추억
- 엄마가 담근 배추김치는 별다른 고급 양념이 들어가지 않아도 맛있었다. 지금은 연세가 드셔서 그때의 김치맛을 재연하진 못하지만 엄마의 김치는 한입 베어 물면 아삭하고 시원해 자꾸 먹고 싶은 중독성이 있었다.
엄마는 김치가 푹 익으면 김치찌개를 자주 끓여주셨다.
그날도 엄마는 양은냄비에 푹 끓여낸 김치찌개로 아침 밥상을 차려 주었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런데..........
냄비 속 김치들 사이로 정체불명의 기다랗고 얇은 지푸라기 모양의 뭔가가 슬며시 삐져나와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설마 하는 심정으로 젓가락을 이용해 물체를 건져내니 그건 바로 지푸라기가 아닌 '귀뚜라미'다리였다.
김치찌개 안에서 여러 개의 긴 다리를 가진 귀뚜라미가 벌건 아침 밥상에 처참한 몰골로 출현한 것이었다.
방금까지 맛있다며 빨간 찌개국물을 떠먹었던 나는 위장이 뒤틀린 듯 속이 울렁거렸다.
우리들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엄마에게 소리소리 지르며 난리를 쳤다. 순식간에 뒤집어진 아침 식사 풍경을 지켜보며 엄마는 민망한 듯 웃으며 한마디 하셨다.
"괜찮아. 귀뚜라미도 단백질이야. 빨리 마저 먹고 학교나 가"
그 당시 부엌에는 귀뚜라미가 많았다.
밤만 되면 이것들이 더 대담해져 부엌 한복판 곳곳을 널을 뛰듯 뛰어다녔다. 그렇게 겁대가리 없이 널 뛰다 끓고 있던 김치찌개 속으로 풍덩. 안 봐도 비디오다. 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