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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현 Apr 19. 2024

엄마와 나는 '따로' 또 '같이' 늙어간다.

인생은 이별 연습이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딱히 통화 목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언제부터인지 별다른 용건이 없어도 엄마에게 매일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노인고독사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매스컴에 연일 보도 될 때마다 시골에 혼자 살고 있는 엄마가 생각났다. 그때부터 전화로 나마 안부를 매일 확인하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된 것 같다.

엄마와 전화 멘트는 늘 비슷하다.

"엄마 뭐해요? 밥은 드셨어요? 오늘 하루도 잘 보내세요~" 몇 마디 주고받다 전화를 끊는다.


엄마는 평생을 시골에 살면서 자식들 얼굴을 가뭄에 콩 나듯 명절 때만 봐오다가 6년 전부터는 언니와 동생이 살고 있는 중소도시로 이사하면서 예전보다는 자주 자식들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딸 셋 중 유일하게 나만 21살 이후로 독립해 여태껏 엄마와 떨어져 외지에 살고 있는 샘이다.


어제는 전화하니 밤 사이 악몽을 내내 꾸어 힘들었다고 하신다.

악몽의 줄거리는 지금은 죽어서 세상에 없는 과거 지인들이 귀신으로 대거 출현해 엄마를 괴롭혔다는 내용이었다. 놀랍게도 그 지인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포함된 적도 있었다.

엄마의 '악몽 스토리'는 사실 매번 비슷하다. 귀신에게 쫓기며 (꿈속에서) 밤새 도망 다녔다거나, 저승사자를 따라갔다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는 내용까지 여하튼 거의 공포영화 심령물 급이다.

그러면서 늘 작심 3일 발언으로만 일관해온 이제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언니(큰딸)를 따라 성당에 나가야겠다는 결의 멘트로 마무리하신다.


엄마의 종교는 수시로 바뀌었는데 어릴 때는 스님의 목탁소리와 함께 불경 외는 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온 집안에 하루종일 틀어놓았고 한때는 교회에 다니셨다. 어릴 때 불경소리를 듣고 있자면 널뛰던 마음이 차분해지곤 했다. 성인이 되어 가톨릭신자가 됐지만 경치 좋은 봄날 고즈넉한 암자의 풍경소리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때 들었던 목탁과 불경 덕분일 게다.


과거 엄마가 종교를 가졌던 이유는 불안이 극에 달해 정처 없이 떠도는 정신줄을 붙잡고자 함이었지만 노인이 된 지금은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 때문인 것 같다. 엄마는 몸이 아플 때마다 지금도 이렇게 참기 힘들 만큼 아픈데 얼마나 아파야 죽는 거냐며 종종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종교적 신념에 근거해 엄마를 안정시켜주곤 한다.


엄마가 사는 아파트는 일명 '노인정 아파트'로 불릴 만큼 모든 가구가 소형 단일 평수로 주로 혼자 사는 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홀로 쓸쓸한 노년을 보내다 가난과 질병, 외로움의 고통을 못 이겨 투신한 노인부터 집에서 혼자 고독사한 노인까지 엄마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 해도 우리 사회 노인 문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돌아가신 분들이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엄마에게는 함께 일했던 동료 할머니였고, 자주 왕래했던 인정 많았던 친구이기도 했다. 가까이 알고 지내던 지인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충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갱년기를 겪고 있는 주변 언니들을 보며 내 50대를, 엄마를 보며 나의 노년기를 짐작한다.

 삶의 난관에 봉착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나보다 내 나이를 앞서 살아낸 분들에게 지혜가 담긴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엄마의 노년을 지켜보며 엄마가 느끼는 죽음의 불안 역시 사사로이 넘기지 못하고 현재 시점으로 미리 당겨 사유해보기도 한다. 또 씩씩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 얼마 되지 않아 더욱 죽음이란 화두가 가까이 느껴진다.


돈, 사회적 지위, 처한 환경 등에 따라 삶의 모습은 조금씩 차이가 나겠지만 대자연의 법칙인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불평등이 만연한 세상에 '시간'이라도 평등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시간의 지배하에 세상 만물은 한시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며 흘러간다.

엄마도 나도 그 변화의 한 지점을 지나며 함께 늙어가고 있다.


엄마의 두려움을 보며 지금부터라도 내 노년기를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노후 준비로 가장 먼저 떠오는 것은 경제적 준비와 더불어 마음의 준비였다. 요새는 자아강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무한 경쟁 속에서 나만의 개성을 찾아 매력 있게 드러내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렇게 비대해진 자아는 자신이 약자가 된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타인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불편해하기 쉽다.

하지만 언젠가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지면 한참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내 몸을 전적으로 의탁하며 다시 아기가 되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전에 자존감은 지키되 자존심은 내려놓으며 몸과 마음에 힘을 빼고 겸손을 연습해 둬야겠다. 겸손을 위해 조건 없이 타인에게 베풀고 반대로 나 역시 조건 없는 타인의 호의를 고맙게 받을 수 있어야겠다.


또 노년기에 가장 위협적인 '외로움'이란 녀석과 친해질 필요가 있다. 사람 좋아하고 인정욕구 강했던 엄마를 평생 힘들게 했던 것도 외로움이었다. 외로움과 친해지기 쉽지 않겠지만 최소한 외로움을 느끼는 것에 대해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나와 가장 친하고 24시간 붙어 있는 친구는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럼 나 자신과 재미있게 놀면 된다. 이렇게 글을 쓰는 행위도 나 자신과 노는 것이다. 혼자 사색하며 산책하는 것도, 혼자 운동하는 것도 내 몸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또 내 뇌를 가지고 놀 기 위해 독서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별에 익숙해져야 한다. 사실 이별은 어떤 이별이건 슬프지 않은 이별은 없다. 더구나 내 의사와 별개로 일어난 이별은 더욱 고통스럽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결국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과도 이별하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을... 그러니 힘들더라도, 서툴더라도 이별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두자.

우선 중년기에 진입한 나는 팽팽했던 피부, 멀쩡하던 관절, 천리안까지 보였던 눈과 슬픈 이별 중에 있다.


마지막으로 지금 순간순간 재미나게 또 의미 있게 살아가자. 풍성한 의미들로 하루하루 채워나가다 보면 어느새 노년기에 진입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건강할 때 좋은 경치 보며 실컷 감동하고, 죽을 때 몽땅 갖고 가지도 못할 돈을 통장에 쌓아두지만 말고 좋은 사람들과 맛난 음식 먹으며 사랑의 말까지 건네보자. 최소한 죽을 때 이름 석자는 못 남기더라도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에 한 스푼이라도 일조해 보자.


죽음이 두렵다는 엄마에게 다음의 말로 위로해드리고 싶다. 

'엄마, 죽음은 앞서 간 사랑했던 사람들이 떠난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거예요. 가장 먼저 아빠도 그 길을 갔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 길을 가셨으니 너무 두려워 마세요. 나 역시 엄마가 먼저 간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뿐이라고 죽음을 앞두고 말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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