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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현 Apr 16. 2024

엄마와 돈. 돈. 돈

엄마와 나, 그리고 돈의 연결고리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딸 셋을 데리고 충청도 시골 읍내로 새롭게 삶의 터전을 옮겼고,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정리해 읍내에 집을 샀다. 또 당장 먹고 살 돈줄을 만들기 위해 남은 돈을 끌어모아 집 앞 공터를 일구어 방 두 칸에 부엌 딸린 작은 집을 지었고 그 집에서 푼돈이나마 알차게 월세를 받았다. 하지만 월세로는 자식들 먹이기에도 턱없이 부족해 엄마는 본격적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나는 그 시골집에서 고등학교까지 학창 시절을 보냈고, 엄마는 무려 40년을 사셨다. 시골집에서 이사 한번 안 가고 40년을 살았다는 뜻은 부동산 투자는 일생일대 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엄마가 평생 추구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원가족과 남편에게 조차 받지 못했던 '사랑과 인정', 그리고 '돈'이었다.

 

엄마에게 돈이란 인생 최고의 가치이자 목숨과도 같은 절대적 존재이다.

76세인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엄마가 호사를 누리고 싶어 강박적으로 돈에 집착하는 게 아니다. 돈이 없어 자식들 공부 못 시키고 밥 굶길까 평생을 전전긍긍 살아오며 돈의 위력을 온몸으로 체감해 온 탓이다. 엄마는 우리 키우면서  '쌀과 김치'만 있으면 걱정할 게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라면서 내내 돈! 돈! 돈타령을 듣고 큰 나는 그놈의 돈이 뭐길래 하는 억하심정과 엄마에 대한 반감이 돈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 첫 직장생활을 하며 받은 월급을 외식과 백화점 쇼핑으로 돈에게 원수라도 갚듯 펑펑 써버렸다. 엄마의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일방향 경제 교육이 낳은 부작용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엄마의 경제교육은 매우 심플했다.

돈 없으면 많이 배운 것도 다 소용없고 오히려 더 무시당한다. 돈을 쓰지 말고 무조건 모아라. 무조건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해라. 딱 세 가지다. 돈은 어떤 방법으로 모아야 하고,  모은 돈을 어떻게 불려야 하는지, 돈이 인생에 있어서 왜 중요한지, 돈을 가치 있게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의 심화 경제 교육은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엄마도 저 세 가지 이상은 몰랐다.


어릴 때 동네 약수터에 다녀오는 길에 배수로 풀밭에서 금반지를(사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게 정말 금반지인지 잘 모르겠음) 발견한 적이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 내 것이 아니니 주우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집에 왔다가 무심코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했는데 당장 가서 주워오라고 엄청 혼이 난 적이 있었다. 보통의 부모라면 남의 물건은 함부로 주우면 안 된다고 가르칠 텐데 엄마는 역시 남달랐다. 엄마에게 혼이 쏙 빠지도록 혼난 우리 세 자매는 다시 약수터로 향했고 두 눈 부릅뜨며 찾아보았지만 금반지가 보일리 없었다.


엄마는 그저 죽어라 일해서 바로 은행으로 달려가 저금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분이다.

그렇게 한번 통장에 들어간 돈은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게 철칙이었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위해 먹는 것도 아낄 만큼 궁색을 떨었다. 엄마에게 밥상은 밥, 김치, 간장, 고추장이면 족했지만 한참 자라나는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그나마 우리 자매들 중 학교에서 우유를 사 먹은 사람은 동생이 유일하다. (당시는 학교에서 우유를 사 먹던 시대였음) 동생은 원체 몸이 약한 데다 밥과 김치만 먹어서인지 얼굴에 버짐이 가실 날이 없었다.


엄마는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한 번은 어렵게 구한 일당 5천 원을 주는 식당 설거지 일자리를 동네 아줌마에게 빼앗긴 적도 있었는데 아마도 식당 주인에게 엄마보다 더 싼 일당을 제시하는 계략에 의해 엄마의 일자리를 가로챘지 싶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한 시골 살림에 허덕이는 시절이었으니 별 일이 다 있었겠지만 그 아줌마는 엄마 표현에 의하면 '남편'있는 여자였고 엄마는 내내 그 아줌마의 간교함을 욕하며 여자 혼자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서러운지 한참을 한탄했다.  


한편 엄마는 '기예'에도 능했는데 집안 고장 난 살림과 보수가 필요해진 집구석구석도 맥가이버처럼 엄마 손만 거쳤다 하면 재탄생했다. 또 목청도 좋아서 트로트나 민요도 아주 잘 불렀다. 노래실력이 엄마의 흥과 결합해 시너지를 내면 나름 좌중을 압도하는 동네 연예인이었다. 동네에서 주민들이 버스 관광을 갈라치면 늘 엄마를 초대 가수로 불렀다. 엄마는 10만 원씩 받고 관광버스에 탑승해 노래도 불러주고 관광도 하며 1석 2조 특수를 누렸다. 당시 10만 원이면 우리 집 한 달 식비였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렇게 자식들 먹는 것까지 아껴가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엄마는 독수리 타법 손가락 두드림 몇 번으로 허망하게 날려버렸다.


바야흐로 시골 촌구석까지 주식 바람이 불던 시기에 외삼촌의 꼬드김에 빠져 엄마 나이 50대 중반에 주식에 입문하여 평생을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모은 돈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한방에 날려버린 것이다.


이제껏 살면서 엄마가 술을 먹지 않고 그것도 맨 정신에 엉엉 우는 모습을 딱 번 본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주식으로 돈을 날렸을 때다. 자식들의 책망을 들을게 뻔해 정확한 액수는 절대 밝히지 않고 있지만(지금도) 내 기억에 딱 5천만 원을 날렸을 즈음 엄마는 안방 주식 그래프가 보이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양다리를 쭉 뻗고 엉엉 아이처럼 울었다.


나는 엄마의 모습에 말 문이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그저 이제 그만큼 잃었으니 더 잃기 전에 주식에서 손 떼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그 후로도 잃은 돈에 대한 미련으로 주식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하고 결국 가진 재산을 모두 날리고 나서야 주식 대장정은 막을 내렸다.  


엄마는 돈을 좋아하고 돈에 집착하는 것에 비해 참 돈복 없다. 

어쩌면 돈을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돈을 감당하지 못했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게다.

집으로 재산을 불리던 시대에도 웬만하면 한 집에서 몇십 년을 산 게 지겨워서라도 더 좋은 입지의 지역으로 이사 갈 만도 한데 이사 한 번을 안 갔다. 우리는 시골집에 얼마나 맛있는 엿을 붙여 놨길래 이사 한번 안 갔냐고 핀잔을 주지만 여행을 위해 잠시 집을 떠나도 불안해 잠이 안 온다는 엄마에게 그놈의 '시골집'을 뿌리째 뽑아서 여행 다녀야겠다고 우스갯소리로 핀잔의 끝을 맺곤 했다.


엄마 인생은 참 롤러코스터 같다.

엄마에 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엄마의 지나온 삶을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이다.


나는 평생을 엄마에게 부모복도, 형제복도, 남편복도 없다는 식의 팔자타령을 들어왔다.

질곡진 자신의 삶을 사주팔자로 정의하고 운명처럼 받아들이는게 마음이 편했던것 같다.


하지만 나는 팔자타령 하는 엄마에게 늘 이야기한다.

인생은 타고난 팔자에 의해 수동적으로 사는것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 선택에 의한 결과들로 이루어졌고 다만,  당시 내 협소한 시야의 수준에서 최선의 선택이라고 착각하는 오류를 범해 인생이 꼬이게 된다고 말이다.


엄마가 내 이야기를 이해하던 말던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설명해준다.


엄마가 앞으로 남은 삶은 최선의 선택만 하며 사셨으면 좋겠다.

삶은 형벌이 아니다. 주어진 삶의 여건 안에서 어떻게든 최대치로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들로 남은 인생을 채워 나가면 되는 것이다.


지금은 가르쳐야 할 자식도, 밥 굶길까 걱정할 자식도 없는 만큼 이제라도 엄마 인생을 편안히 사셨으면 좋겠다. 평생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껏 사 먹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먹고 싶은 음식은 바로 사드셨으면 좋겠다. 평생 가난에 쫓기듯 살아왔으니 이제라도 마음 편히 누리셨으면 좋겠다.


"엄마. 평생 돈돈돈해도 부자가 안됐으면 이제 그만 돈돈돈 하시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은 삶을 누리셨음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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