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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현 May 02. 2024

9살, 죽기로 결심하다.

엄마와 나. 그리고 분노의 연결고리

이 글은 엄마를 비난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다.

단지 지금 내 삶의 가치관과 지향점이 형성되기까지 엄마의 세상에 속해있던 내 어린 시절 점선의 순간들도 현재의 직선을 이루는데 일조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기에 한 번쯤은 상처투성이였던 어린 시절의 순간으로 시간 여행자가 되어 주저앉아 울고 있는 어린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토닥이며 위로해 주고 싶을 뿐이다. 몸은 성장을 향해 달려 나갔지만 마음은 상처를 부여잡고 동여매느라 따라잡지 못한 것이 어느새 거리가 벌어져 아득해져 버렸다. 구석에 혼자 웅크려 있는 어린아이를 일으켜 늦어도 괜찮으니 힘을 내어 한발 한발 함께 나아가자고 격려해주고 싶다.  


나는 어린 시절 상처를 봉합하지 못한 채 혹시 상처를 드러내면 고름이 터져 나올까 두려워 밴드로 덮어가며 조심조심 살아왔다. 결국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내 삶을 덧나게 했고 때로는 흉터를 남기기도 했다. 곪아버린 상처가 자신을 돌봐달라는 듯 통증으로 신호를 주었지만 나는 세상사에 몰두하며 회피전략으로, 때로는 성취라는 마약성진통제로 상처를 외면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내 마음이 아닌 세상것들에 정신을 팔고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며 이제 이만하면 과거의 상처 따윈 거의 나았구나, 나는 더 큰 사람이 되었구나라고 섣부른 단정을 내리곤 했다. 하지만 그런 자만의 순간에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가 내 발목을 잡고 물고 늘어지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을 때면 깊은 한숨을 내쉬곤 했다.


과거의 시간들을 내 안에 가둬둔 채 불행했다 판단하며 우울로 채색하기보다 유유히 흘려보냄으로써 상처 위에 흉터가 아닌 고운 새살이 돋을 수 있도록 건강하게 성장해 나가고 싶다.


앞서 밝혔듯이 엄마를 향한 나의 기본 마음의 토대는 '사랑'이다. 엄마를 미워했던 시간들도 사랑의 일면이었고 많이 사랑하고 있음의 방증이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이 치유의 과정이 되어 어린 시절의 나를 위로하고 다가올 삶 또한 긍정과 희망으로 채색되길 기대해 본다.


내 어린 시절은 엄마의 방황으로 직격탄을 맞은 시기였다. 

엄마는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했고, 부정적이었고, 무절제했고 유흥을 좋아했으며 어린 딸들만 집에 남겨두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엄마가 장롱 거울 앞에 앉아 화장하기 시작하면 늦은 밤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암시했기에 엄마가 화장만 하면 심장은 두근거렸고 두려움과 불안, 외로움에 안달이 나 마치 주인의 외출을 앞두고 끙끙대는 강아지 마냥 엄마에게 매달며 엄마 곁을 떠나지 못했다. 내 행동이 귀찮았던 젊은 엄마는 외출하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킨 후 화장이 끝나면 형형색색 옷으로 깔맞춤 하고는 금방 돌아온다는 뻔한 거짓말을 남기고 슬그머니 집을 나서곤 했다. 엄마의 부재와 잦은 거짓말, 술이 불러온 각종 문제들로 내 아동기와 사춘기는 불안했고 외로웠고 슬펐고 엄마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했다.


나의 9살은 전국불행어린이 대회가 있었다면 빅 3에 들었을 것이다.

어린이날을 제정하신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지하에서 노하실 일이다만 정말 그랬다. 어린이날만 되면 tv에서는 세상 행복한 듯 활짝 웃는 모습의 어린이가 양손에 자애로운 미소를 띤 부모님의 손을 잡고 신나게 뛰어노는 장면이 나오곤 했다. 그나마 국가에서 정한 어린이날만이 어린이는 사랑받아야 마땅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는 존재임을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9살에 요즘 같으면 사회 1면에 이름을 올릴 뻔한 짓을 한 적이 있다.

기사 제목은 '우리나라 자살문제 심각! 9살 어린이가 자살을 시도하다' 정도가 적당하겠다.

9살이 뭘 안다고 자살을 생각하나 하겠지만 내 경험에 기반하건대 충분히 자살을 생각할 수 있는 나이다.


자, 이제부터 9살 인생 죽음의 위기를 넘긴 청소년 관람 불가 드라마 한 편 써보겠다.


때는 햇살이 부드럽던 화창한 대낮이었다. 어린 꼬마는 목적지 없이 동네 익숙한 길을 무작정 걸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 꾸역꾸역 올라오는 거친 분노를 욕설과 함께 토해냈다. 그 욕설의 대상은 바로 '엄마'였다.

폭발하던 분노의 용암은 비명을 내지를 새도 없이 아이를 지탱하던 마음속 뿌리까지 녹여 버렸다.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그날의 찬란했던 햇살은 내 마음까지 닿지 않았고 내 세상은 어떤 빛도 투과할 수 없는 절망이란 돌무더기로 단단히 덮여있었다. 절망이란 감정은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질 공간 자체가 없어 절망 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다. 9살에 내가 겪은 절망은 그랬다.


9살 아이는 이제 죽기로 결심하고 죽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풀'을 먹는 것이었다.

때마침 시골길 귀퉁이에 널려있는 것이 풀이었다. 그렇게 길가에 널려있던 풀 몇 포기를 뜯어 입에 넣고 야무지게 씹어 삼켰다. 이렇게 길을 걸어가다 풀이 뱃속으로 들어갈 즈음 죽을 거라 기대하며 죽기만을 기다렸다. 가만히 기다리기가 왠지 심심해 터벅터벅 가던 길을 다시 재촉해 걸어갔다.


그런데 입에 풀 향기만 맴돌 뿐 한참을 걸어도 갑자기 픽 쓰러져 죽는 일 따윈 생기지 않았다.

바보 같으니라고....

그제야 풀을 먹어도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일은 성인이 된 후에도 엄마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나만의 망각창고에 꽁꽁 숨겨두었다.


당시를 떠올리면 오래된 영화 속 장면처럼 엄마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며 길을 걸어가던 어린아이의 모습과 내 감정과 철저히 괴리된 듯한 맑고 화창했던 날씨가 떠오른다. 영화 속 어린 배우는 풀을 먹고 죽으려 했는데 그 일에 앞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삭제된 듯 떠오르지 않는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돌아가신 아빠, 방황했던 엄마, 가난한 환경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중 그 무엇도 선택한 적이 없다. 출생과 함께 악조건의 가정환경에  나쁘게  당첨되었지만 이후의 운은 내가 만들 수 있도록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살기 위해  엄마를 향한 애착이 낳은 분노라는 감정 대신 엄마에 대해 철저한 무관심을 선택했다. 

고등학교 시절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지만 나는 엄마의 병문안조차 가지 않았다. 당시 엄마의 존재는 내 마음속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있었다.

 

엄마의 삶과 분리하 않는다면 엄마의 그늘 아래로 전락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이 내 가정환경을 원인 삼아 미래를 예측하는 것과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엄마의 방황으로 엄마의 삶이 괴롭고 파괴되는 것을 보았기에 나는 방황하지 않았고 현재의 삶에 충실했다. 또 자기 연민에 빠져 세상을 원망하는 엄마의 모습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기에 긍정적 시선으로 세상을 믿으며 내 안에서 답을 찾아 삶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내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엄마를 원망하기보다 이해하는 쪽이  더 유익했다. 엄마를 원망하는 것은  불행했던 과거에 매달려 한탄하는 어리석은 행동에 지나지 않아 성장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  과거의 시간을 확대해석 하지도, 의미를 축소하지도 않고 그냥 그랬었지 정도로 흘려보냈다.


어린 시절 힘든 순간마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나는 강한 사람이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은 살지 않는다. 지금의 현실은 진짜 나의 현실이 아니다. 앞으로 내 삶은 더 나아진다.'


나는 이 모든 사고를 엄마 덕분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했던 것 같다. 지나 보니 엄마는 내 엄마이기 이전에 내 삶을 일깨워 성장시켜 준 스승이었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는 온 우주이며 세상의 전부이다.

아이가 알고 있는 세상은 부모가 전부이기에 아이가 위협적이라고 느끼는 상황(배고프고, 슬프고, 두렵고 무서울 때)뿐 아니라 기쁨의 상황에도 아이의 눈빛은 오롯이 부모를 향한다. 아이의 간절한 눈빛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평소 부모의 시선이 아이에게 향해 있어야 한다. 세상사에 정신 팔려 아이의 존재를 잠시 잊었더라도 아이가 찾아와 구조를 요청할 때 만이라도 아이에게 집중해 감정을 살펴주어야 한다. 아이가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한 상태임을 확인했을 때 아이는 부모를 신뢰하고 그 신뢰에 힘입어 부모라는 세상을 넘어 더 큰 세상으로 눈길을 돌릴 수 있다.


곧 어린이날이 다가온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하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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