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앓이와 주산학원 앓이
엄마와 나, 그리고 사교육의 연결고리
요즘은 동네마다 어린 아이들 보기 힘들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집집마다 아이 둘셋은 기본이었다.
우리 집만 해도 딸만 셋이었고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아들 낳을 때까지 계속 낳았을 거라는 엄마의 단언하에 최소 기본 넷은 되었을 터다.
요즘 집 앞마당은 주차장으로 쓰이지만 당시는 차가 많이 없던 시절이라 시골집 앞 공터는 동네 아이들이 몸 부대끼며 놀 수 있는 전용 놀이터였다. 실컷 놀다가 밥때가 되어 엄마가 부르면 집으로 가 후다닥 배를 채우고 다시 나와 옹기종기 놀이를 이어갔다. 그렇게 동네 아이들의 시끌벅적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한결같이 아침형 인간이었다.
초저녁만 되면 눈이 슬슬 감기는데 아마도 밤 9시만 되면 뉴스에서 어김없이 흘러나오던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라는 멘트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밤늦도록 티브이를 보며 놀다가도 뉴스의 시작과 함께 위 멘트가 흘러나오면 바로 불을 끄고 이불 속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일찍 자는 만큼 이른 새벽에 눈을 떴는데 그때마다 엄마와 언니. 동생은 모두 자고 있었다.
혼자 일어난다 해도 같이 놀 사람도 없는 터라 다시 잠을 청하려 꼼짝 않고 한참을 누워있어 봐도 무료함과 심심함으로 온몸이 근질거리면 단잠은 저만치 도망가 버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혼자 새벽부터 일어나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시골 동네를 하릴없이 배회하다가 친구네 집 대문 앞에서 '친구야~ 놀자'라며 친구 이름을 목청껏 외쳐댔다. 이른 새벽 친구 집은 아무도 일어난 사람이 없다는 듯 내 주책없는 부름에도 조용했다.
그러면 다시 심심함을 견디려 혼자서 동네 어귀를 어슬렁 거렸다.
우리 동네에는 나와 동갑인 친구가 두 명 있었는데 이름은 선희와 순주였다.
사실 어릴 적 친구였던 선희와 순주를 기억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우선 선희는 외동딸이었고 당시 가난한 시골집 아이들은 얼씬도 못했던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아침마다 근사한 노란색 빵모자를 쓰고 노란색 가방을 어깨에 메고 유치원에 가는 선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유치원 갈 일도 없는 아이라 잠이나 더 자면 좋겠는데 쓸 때 없는 부지런함을 탑재해 꼭두새벽만 되면 반사적으로 눈이 번쩍 떠져 선희가 유치원 가는 모습을 종종 지켜보곤 했다.
선희는 유치원에서 무슨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걸까?
또 노란색 유치원가방 안에 어떤 책이 들어있는 걸까?
나도 유치원에 다니면 아침에 눈 뜨자마다 심심해 못견디는 이 고질병이 나아질것만 같았다.
결국 7살 무렵, 유치원에 대한 궁금증과 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선희를 쫓아 유치원에 무작정 따라갔다.
그렇게 유치원에 가서 아이들 속에 섞여 율동도 배우고 공부도 잠깐 했던 것 같다. 유치원 선생님은 엄마한테 보여주라며 유치원가방과 그 안에 몇 가지 학습지도 넣어주셨다. 나는 이걸 받아가면 엄마한테 혼이 날 거라고 소리죽여 말했지만 선생님은 일단 집에 가서 가방을 보여드리고 유치원에 다니고 싶다고 말하면 엄마가 보내주실 거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도저히 엄마에게 유치원에서 가방을 받아왔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다락방에 가방을 숨겨두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선희와 함께 유치원에 가고 싶다는 열망에 한밤중에 이르러서야 주섬주섬 가방을 꺼내 엄마에게 내밀며 이실직고 했다.
엄마는 덥석 받아온 유치원 가방에 깜짝 놀라며 내일 아침 당장 가방을 돌려주고 오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선희처럼 유치원에 다니고 싶다고 징징거렸다. 하지만 어린시절 우리 집은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형편이어서 유치원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린 내게 그런 현실적 상황은 안중에도 없을뿐더러 내 알 바도 아니었다.
결국 다음날 아침, 잔뜩 주눅이 든 채 유치원에 찾아가 노란 가방을 반납하고 나서야 내 유치원 앓이는 막을 내렸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엄마가 당시의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계신 걸로 보아 아마 엄마에게도 그 날의 일은 가슴 아픈 일화였던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참 욕심이 많았다.
언니와 동생은 일찍 철이 들어 우리 집 형편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엄마에게 뭘 사달라고 보채거나 학원 보내달라고 조른 적이 없었지만 나는 달랐다.
국민학교 3~4학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동네 친구 순주에게 함께 놀자고 했더니 자기는 학원에 가야 해서 놀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빨간색 주산학원 가방을 들고 읍내에 있는 주산학원에 간다고 했다. 요새 아이들이 피아노 학원이나 태권도 학원에 다니듯 당시는 주산학원이 대세였던 시기였다.
내 인생 유치원 앓이에 이어 또 한번의 주산학원 앓이가 시작되었다.
나는 또 엄마에게 순주처럼 주산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졸랐다. 내 기억에 한 달 이상 졸라댔던 것 같다. 나도 간절하게 빨간색 가죽으로 된 주산학원 가방을 멋지게 들고 학원에 다니고 싶었다. 지금 생각함 유치원이 아닌 유치원 노란 가방이, 주산학원이 아닌 빨간색 가죽 가방이 갖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놈의 가방에 꽂히고 모든 아이들이 다 다녔던 학교가 아닌 학원에 다니는 동네 친구가 부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유치원에 못 보낸 게 엄마도 한이 되었는지, 아니면 한 달 이상 졸라대며 결코 포기할 것 같지 않은 어린 딸의 굳은 결기에 백기를 든 것인지 결국 엄마는 학원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주산학원에 등록하고 학원에 등원하던 첫날은 눈이 펑펑 내렸던 겨울 방학 아침이었다.
학원 선생님은 아침 9시부터 문을 연다고 했지만 나는 드디어 학원에 간다는 설렘에 이른 새벽부터 눈이 떠져 잠을 더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8시가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다 안달이나 결국 30분 이른 7시 반에 주산학원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도 참 극성이었지만 당시는 oo주산학원이라고 표기된 뻣뻣한 빨간색 가죽 가방을 들고 당당히 걸어가는 내 모습이 그렇게 멋지고 좋을 수 없었다. 하얗게 쌓인 눈 위를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눈은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냈고 학원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내 마음처럼 신이 났다.
그렇게 학원에 도착했지만 이른 시간으로 셔터문은 내려져있었고 나는 문을 두드려 선생님을 깨운 후에야 학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선생님은 한시간이나 일찍 온 나를 의아해 하셨지만 나는 이 감격과 기쁨을 털어놓으면 왠지 촌스럽다고 할것 같아 시간을 잠시 깜박했다고 둘러댔다.
엄마는 어려운 형편에도 어릴 적 내 꿈을 지원해 주었다.
어찌 보면 형편에 맞지 않게 친구가 하는 것은 모두 하고 싶어 몸삻을 앓고 늘 꿈을 꾸는 딸로 인해 엄마도 버거웠을것 같다.
"엄마, 없는 형편에 욕심이 가득했던 딸을 힘들었던 와중에도 지원해 주어 고마워요. 엄마가 어려서부터 그랬잖아요. 엄마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많이 배우지 못해서라고요. 그래서 나는 더 많이 배우고 싶었나 봐요.
엄마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