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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주)가정의 시스템 리포트

돌봄의 지속 가능성을 설계하다

by LINEA
아이가 태어나자, (주)가정의 구조는 한 명의 생명을 중심으로 다시 짜야했다.
한쪽의 하드캐리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성향에 맞게 역할을 다시 나누었다.


리포트 1: 개발자와 기획자

역할이 분화되자, 집 안의 모든 일이 작은 실무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기획자처럼 설계하고, 남편은 개발자처럼 구현했다.

내가 식단을 짜면 남편이 만들고,
남편이 클라이언트(아이)의 반응을 업데이트했다.
“오늘 고구마 반응 괜찮았어. 내일은 10g 더.”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장보기 리스트를 수정했다.

남편은 직접 돌봄(Direct Care)을 맡았다.
밤 수유, 아이 목욕, 조금 더 커서는 이유식 담당.
수유 간격과 수면 시간을 앱에 기록하며, 아이의 데이터를 쌓았다.

나는 간접 운영(Indirect Operation)을 맡았다.
재료 장보기, 가재도구 준비, 용기 소독, 옷과 용품 관리.
돌봄의 품질을 높이는 백엔드 같은 역할이었다.


우리는 가정 프로덕트를 만드는 팀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리포트 2: 공정한 거래


솔직히 말하면,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편이 맡았다.
단순 반복과 미세한 손길이 필요한 일.
그는 불평 없이 했다.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조금 미안했다.


그래서 나는 제안했다.
“남편이 육아 실무 성실히 하잖아. 그럼 집안일은 내가 할게.”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돼?”
“응, 공정한 거래지.”


그렇게 역할이 명확히 나뉘었다.
남편이 이유식을 만들면 나는 빨래를 돌렸다.
남편이 아이를 재우면 나는 설거지를 했다.
교환이 명확해지자, 불만은 자연스레 줄었다.

우리는 싸우지 않고 조정했고, 조정한만큼 효율이 올라갔다.


리포트 3: 아이 옷 정리


아이 옷 정리를 할 때,

남편은 군대식으로 반듯하게 개고,
나는 “어차피 내일 또 펼 거잖아” 하며 대충 접어 넣는 편이었다.
대신 손이 닿는 순서대로, 쓰기 편한 자리에 넣어둔다.

아웅다웅 한 끝에, 내린 우리의 결론이다.
남편이 반듯하게 접으면, 나는 사용 빈도에 맞춰 정리했다.

보기에도 깔끔했고, 쓰기에도 편했다.
한쪽은 정확함으로, 한쪽은 현실 감각으로.
서로 다른 질서가 한 집 안에서 공존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주)가정이 보다 잘 돌아가는 쪽을 선택했다.


리포트 4: 가정의 수호자


어느 날 자정쯤, 아이가 갑자기 울며 깼다.
10분, 20분, 30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나는 당황했지만, 남편은 한 시간 동안 침착하게 토닥였다.

그날, 남편이 왠지 멋있어 보였다.
가끔은 남편의 묵묵함이 답답했지만, 오늘 그 진가를 발휘했다.

이제는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남편의 침착함은 가정을 수호하는 안정감이었다.

리포트 5: 감정 소모 방지 시스템


남편과의 육아 프로젝트 중 짜증이 날 때도 있었다.
남편이 아이 돌볼 때 핸드폰을 보거나, 디테일을 놓치면 나는 언짢았다.

그래도 서로의 사소한 불만은 굳이 꺼내지 않으려 했다.
에너지도 아끼고 싶었고, 남편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테니까.
크게 터질 일이 아니라면 '그럴 수 있지' 하며 적당히 넘어갔다.


그게 냉정한 건지, 성숙한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 소모 방지 시스템이었다. 생존을 위하여.
우리는 감정 표출보다 시스템 유지를 택했다.


리포트 6: 시스템의 결론


우리가 만든 구조는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굴러갔다.


우리는 한동안 감정 표현이 부족한 부부라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란 걸 알았다.

감정은 사라진 게 아니라, 형태를 바꿔 시스템 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이건 네가 잘할 일이다’라는 신뢰.
‘네 방식을 믿는다’는 존중.


이것은 애정의 언어이자, 우리가 쓸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감정 표현이었다.

그는 정확함으로, 나는 예측으로. 우리는 여전히 같은 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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