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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주)가정의 문화

덜 뜨겁지만 오래가는 관계

by LINEA
모든 부부는 자기들만의 문화를 만든다.
문화에 정답은 없다. 다만 서로가 납득하면 된다.


(주)가정의 신뢰 작동 방식


함께 산 지 몇 해가 지나자, 우리는 서로의 영역을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당근마켓에서 핸드폰을 하나 샀다.

남편은 새 폰을 보더니 이렇게만 말했다.
“업무용? 잘 안된다 그랬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예 터치가 안되더라고.”
“그렇군.”

우리는 필요할 때만 묻고, 나머지는 믿고 넘기는 사이가 됐다.

남편은 물건 욕심이 없는 내 성향을 안다. 그래서 자세히 묻지 않는다.
우리의 구조에서는 이렇게 하는 게 효율적이다.
그래도 최소한의 장치는 있다.

사전 상의 대상: 고가·장기 약정·공용 기기.

사후 공유로 충분한 것: 개인 소모품·업무 보조 도구.

정기 체크: 정기 결산시 거래내역 한 번 훑고 “이 정도면 괜찮다” 합의.


서로가 허투르게 쓰지 않을 것을 알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판단하고, 정해진 예산 안에서 움직인다.
공동경비를 쓸 땐 메모에 적어둔다. 굳이 보고나 허락이 필요하지 않다.

무심함이 아니라, (주)가정의 신뢰가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주)가정의 ROI


생일이 다가오니, 엄마가 묻는다.
“뭐 필요한 거 없어?”
“딱히 생각이 안 나는데…”

앞에 말했듯, 내가 필요한 건 알아서 사는 편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머리가 하얘진다.
‘평소에 살 수 없는 게 무엇일까…’

그러다 남편의 위시리스트가 떠올랐다.
남편의 취미는 커피다. 커피 장비에 관심이 있다.

마침 최근에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그라인더가 미세하면 좋을 거 같아. 지금 건 별로야.”


그럼, 차라리 남편의 희망사항을 들어줄까?
며칠 고민했다. 그래도 꽤 큰 기회비용이라서.
그래도, 이럴 때 사면 좋을 것 같았다.

“남편, 마음 바뀌기 전에 그라인더 모델명 빨리 찾아봐.”
"그래도 돼?"
"나도 맛있는 커피 먹으면 좋으니까. 엄마도 얻어먹고."

그래서 남편은 그라인더를 샀다. 내 생일선물로.

나도 좋은 커피를 마시고, 그는 원하던 장비를 손에 넣었다.
꽤 효율적인 거래였다. 우리 둘 다 만족했다.


사실 이런 식의 거래는 종종 있었다.
누가 뭐 갖고 싶냐고 물으면 나는 “생각 안 나”라고 답하는 사람이고,
내가 뭘 살까 망설이고 있으면 남편은 슬쩍 자기 목록을 끼워 넣는다.

처음엔 드리퍼, 다음엔 사이폰, 그리고 이번엔 그라인더였다.


잠깐은 내 기회비용이 아까웠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남편이 좋으면 나도 좋다.
커피가 맛있어지면 내 입도 행복하니까.

그게 우리 관계의 ROI(Return on Investment, 투자 대비 수익률)였다.
서로의 효율이 애정의 형태로 작동하는 상태.


우리에겐 사랑이 감정이 아니라, 구조가 만들어준 수익이었다.


낭비 없는 전달 방식


나는 생일마다 선물 대신 편지 한 통만 달라고 말한다.
물질보다 마음이 더 오래 남는다고 믿어서였다.

올해 남편의 생일 편지는 세 줄짜리였다.

아이의 모습에 내가 담겨있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나가지만 우리는 조금씩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네가 있어 집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 같다.


이건 대충인가 진심인가.
“이거 날로 먹는 거 아냐?”
남편은 굉장히 억울해했다. 진심을 몰라준다나?

"다음엔 A4 한 장 이상 써야 통과시켜 줄 거야.”
"... 노력하죠."

처음엔 심플한 표현이 서운했다.


하지만 남편의 스타일을 생각해 보니,

감정을 줄인 게 아니라, 감정을 단어 낭비 없이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그에게 사랑해 보다 익숙한 언어는
알았어”, “내가 할게” 같은 말이었다.


감정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남편의 방향은 늘 나를 향해 있었다.

사랑의 다른 형태


어느 주말 아침, 남편이 내린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이 사람, 매번 이렇게 해주네.’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사소한 일상이 쌓이고 쌓여서, 남편이 좋다는 감정도 커져갔다.

이 사람은 나를 설레게 하진 않았지만, 나에게 안정감을 준 사람이다.

그리고 안정이, 시간이 지나며 감정의 형태로 되돌아왔다.


결혼 초기엔 이 사람이랑 평생 살 수 있을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힘들었겠다고.


감정이 먼저 온 결혼은 아니지만,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확신은 강해진다.
그게 사랑의 다른 형태였다.

사랑의 생성 구조:
대부분의 사랑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설렘 → 사랑 → 신뢰 → 안정

우리의 사랑은 반대였다.
신뢰 → 안정 → 의존 → 사랑


감정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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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부가 이렇게 살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매일 "사랑해"를 말해야 안심하고,
어떤 사람들은 스킨십이 많아야 연결감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관계는 감정의 과잉보다 질서의 효율에서 편안함을 찾는다.

우리는 그 범주의 부부였다.
구조의 안정이 큰 집.


감정을 설명하지 않지만, 가정 내에 우리만의 따뜻함은 전해졌다.

덜 뜨겁지만 오래가는 방식. 우리 둘의 자연스러운 합이었다.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조용히 만들어진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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