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항상 이성으로 풀리지 않는다
테스트기에 두 줄이 찍힌 이후, 우리의 질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가정의 구조는 요동치는 감정 앞에서 멈춰섰다.
“나 임신했어.”
“그래?”
남편은 당황한 건지, 그냥 평소처럼 무표정이었다.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없었다.
나도 더는 할말이 없었다.
소식을 알리고 나서, 남편은 3일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평소처럼 밥을 먹고 출근했고, 돌아와선 각자의 일을 했다.
4일쯤 지난 토요일, 참다못해 한소리 했다.
“다른 집은 아내가 임신하면, 좋다고 난리도 아니던데, 이게 뭐야?”
“아... 그렇군.”
잠시 후, 그는 약속이 있어 나갔다.
돌아온 그는 꽃다발 하나를 들고 왔다.
“축하합니다.”
"....??"
제3자의 임신도 아닌데, 왜 이렇게 어색할까.
어이가 없었지만, 남편 나름의 표현이라 생각했다.
남편은 데이터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 사람이다,
결혼은 통계로, 전세는 등기로, 노트북은 제3자 판결로 결정하던 사람.
하지만 임신엔 통계도 매뉴얼도 없었다.
3일은 그가 ‘프리징’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4일째, 그는 일반적 프로토콜을 실행했다.
축하 = 꽃다발.
어쩌면 남편이 낼 수 있는 최선의 감정이었던 것 같다.
임신을 하니 평소와 같은 대화가 잘 안됐다.
쉽게 감정이 올라온다.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았다.
어느날 문득 샐러드바가 먹고 싶었다.
“남편, ㅁㅁ역에 있는 미스터피자 가자.”
“거기 왜? 집 앞에도 있는데? 굳이 거기까지?”
“... 안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물을 수 있는 질문이지만,
당시의 내게 필요했던 건 ‘그냥 따라주는 일’이었다.
나는 내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고,
남편은 이 상황을 해석할 데이터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서 괜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남편이랑 미스터피자 안먹을거야.”
임신 내내 관계는 불안정했다.
임신 주차가 올라갈수록 몸이 힘들었다. 말도 짧아졌다.
남편은 더 조심스러워졌고, 나는 더 예민해졌다.
별일 아닌 일에도 짜증이 났다.
나는 감정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늘 상황을 확인하려 했다.
"괜찮아?” 대신 “병원은 뭐래?”
괜히 대답하기 싫었다.
그때부터 대화는 필요한 말로만 줄였다.
퇴근 후 혼자 밥을 먹고, 카페에 가서 일기를 끄적이곤 했다.
감정이 복잡한 날엔 상담사에게 연락했다.
누군가에게 말해야 풀리겠는데, 남편에겐 도무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는 걱정이 아니라 ‘공감’을 원했다.
하지만 남편은 공감이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우리는 같은 집에서 서로 다른 회로로 살아갔다.
열 달이 다 되어갈 즈음, 예정일보다 일찍 진통이 왔다.준비가 다 끝나기도 전에 병원으로 향했다.
출산 이후, 나의 모든 시스템은 멈췄다.
살면서 처음으로, 나는 몸도, 마음도 약자가 되었다.
남편이 내 몫까지 움직여야 했다.
아이스커피를 사오고, 아이가 오기 전 집을 치우고,
남편은 자잘한 일들을 하나씩 메워갔다.
아이가 집으로 와서도 남편은 책임을 다하려 애썼다.
밤중 아이 돌봄을 번갈아 하다가,
어느날 부턴가 내가 못 일어나는걸 보면서
스스로 새벽마다 아기를 안고 일어나 분유를 탔다.
젖병을 소독하고, 다시 눕히고, 그제야 잠이 들었다.
“남편, 괜찮아?”
“…군대 불침번 서는 기분이야. 그래도 내 아이니까 괜찮아.”
그는 ‘해야 할 일’을 사랑보다 먼저 아는 사람이었다.
불안이나 부담을 말로 풀지 않고, 행동으로 처리했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이전까지 우리는 맞물려 잘 굴러가는 톱니바퀴였다.
하지만 출산 이후, 한쪽이 멈추자 남은 한쪽이 전부를 감당해야 했다.
남편은 나의 공백을 홀로 메워냈다.
그는 아침부터 밤까지, (주)가정의 구조 자체가 되었다.
남편의 하드캐리 덕에 우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제는 누군가를 돌보며 동시에 서로를 유지해야 하는,
이전보다 높아진 난이도의 조별과제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