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이 최선이라 생각했던 부끄러운 과거 고백
내가 중고등학교에서 만났던 선생님들은 체벌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분들이었다. 학기 초 교실에서는 별 일도 아닌 것으로 생트집을 잡아가며 매타작을 하던 선생님들을 매 시간마다 만날 수 있었다. 그 선생님들이 학기 초에 유독 매를 휘두르는 이유를 대학교 4학년 때 알게 되었다. 교육실습을 나가 배운 학급운영에 대한 꿀팁 중 하나가 '학기 초에 무엇이든 이유를 만들어 학생 하나를 두들겨 패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매타작을 견디며 중고등학교를 다닌 이후에, 그런 학급운영법을 배워서 그랬던 것일까. 처음 교단에 선 나는 아이들에게 매를 큰 고민 없이 드는 교사였다.
체벌은 참 쉽고 간단하다. 학생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정제된 언어로 타이르지 않아도 되고, 교사가 받은 상처를 애써 삭히려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냥 몽둥이 하나 들고 두들겨 패기면 하면 금쪽이의 부적절한 행동이 교정이 되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학생들에겐 모델링이 되고, 심지어 교사 개인의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다.
하지만 체벌은 그 후폭풍이 엄청나다. 이미 수많은 교육학 책자에도 적혀있는 내용이지만 내가 겪은 예를 통해 굳이 설명해 보겠다. 먼저, 부적절한 행동은 '단기적'으로 교정이 될 뿐이지 소거되지 않는다. 그리고 체벌을 당하는 이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몸과 마음이 깊은 상흔을 남긴다. 그 상처는 나이를 먹어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또렷해진다. 그리고 교사를 교육자가 아닌, 복날에 개를 때려잡는 개장수로 만든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체벌이다.
인내심이 부족하고 인간적 성장에 딱히 관심 없던 새내기 교사였던 나는 체벌을 아주 쉽게 했던, 아주 무능한 교사였다. 물론 이유 없이 매를 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학생과 나 사이의 관계를 매우 선득하게 만들었고, 해당 학생의 문제행동이 딱히 교정되지도 않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머지 아이들은 날 어떻게 생각했을까. 감정표현에 서툴고 세상에서 들어오는 자극에 예민한 나의 제자들 눈에 비친 나는 괴물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학교는 체벌이 뭔가, 학생의 문제행동을 보고 빨간색 스티커를 붙여 경고를 줬다고 아동학대로 신고를 당하는 게 현재 교사들의 현실이다. 교실에서 학생이 책상을 뒤집어엎어도, 그것을 말리는 교사의 따귀를 때려도, 학생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온몸이 얼룩덜룩해져도 그것을 삭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 학부모들은 여전히 교사에게 분노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이 학창 시절에 만난 교사의 탈을 쓴 개장수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나는 매를 들지 않는다. 하지만 학생들이 날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피드백을 간혹 받는다. 특수교육실무사, 그녀를 대신했던 대체 실무사, 심지어 장애학생 활동보조인에게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면 엄청난 모멸감이 든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묻고 싶다. 학생들이 날 무서워할 수 있는 방법이 뭔지 저에게 알려주시겠어요. 혹시 체벌을 말하실 것은 아니죠? 거친 감정이 가득 섞인 독설을 내뱉으며 듣는 이의 마음이 상처를 주실 것도 아니실 거고요? 그런 행동을 제가 이 교실에서 했을 때 저에게 닥칠 후폭풍을, 당신은 책임져줄 수 있으신가요? 어쩜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시는 거죠?
지금의 나는 맞는다. 그리고 덜 맞기 위해 주먹을 날리는 학생의 손목을 움켜쥔다. 해당 학생은 나에게 자신의 손목을 아프게 했으니 아동학대로 신고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난 제발 신고해 달라고 대답한다. 학생의 거친 마음이 잠잠해지면 그제야 입을 열어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다.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해당 학생의 손톱을 깎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특수교사인 나와, 통합학급 교사와 친구들의 몸에 생채기를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 내에서 그 아이가 혼자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자원봉사자를 배치했다. 자신의 아들과 매일 밤마다 치고받고 싸우는 학부모님도 아이에게 잠시 분리시켰다. 이런 시간들이 겹겹이 쌓이자 학교에서 나타나던 분노폭발이 일주일에 한 번에서 한 달에 한 번으로, 지금은 분기에 한번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무려 1년 반의 시간이 걸렸다. 남들이 보면 참 답답하게 산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손톱처럼 느리게 변화했지만, 어찌 됐던 마침내 변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출근하기 전, 반드시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먹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난 출근할 수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렇게까지 하는 내가 참 안쓰러웠지만, 이젠 그냥 출근하기 전에 비타민 먹는다고 생각하고 빈 속에 삼킨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학급운영이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지금 나의 교실은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따가운 햇빛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쉴 수 있는 쉼터가 되었다. 아직은 그 나무가 작아서 그늘이 크진 않지만, 언젠가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처럼 넓고 깊게 시원한 쉼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날이 올 때까지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