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임용고사를 준비하다
내가 교단을 처음 밟은 순간, 기간제 교사 신분이었다. 막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200만 원이 넘는 돈을 벌게 되니 기뻤다. 하지만 이 순간은 잠깐이고, 난 다시 임용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을 늘 상기했다. 90일간의 기간제 교사 생활 이후, 임용 공부에 2년을 매진했다. 하지만 재수, 삼수 모두 커트라인과 한참 차이 나는 점수로 1차 불합격을 했다.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란 가슴 시린 문구가 떠있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다짐했다.
난 정말 공부에 재능이 없구나,
이렇게 청춘을 허비하며 사느니 그냥 돈이나 벌어야겠다.
운이 좋았다. 그 마음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장애인 시설의 장애유아전담교사로 취직을 했다. 다시 받게 된 월급은 100만 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적은 월급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존재가 다시 되었다는 것이 참 기뻤다. 그리고 앞으로는 임용시험 따위 준비하지 말자란 결심을 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견디다 못해 시설을 탈출했다. 그리고 시작된 단 10주간의 기간제 교사생활, 또 동료교사와의 관계를 망치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지만 좋은 동료분들 덕분에 새로운 세계에 녹아들게 되었다. 이런 동료, 이런 학교만 근무할 수 있다면 기간제 교사로 살아도 괜찮겠단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기간제 교사 생활이 늘 좋았던 것은 아니다. 한 때 '을'이란 말이 참 유행했었다. 하지만 기간제 교사는 '갑을병정'에서 '을'도 아닌 '정'에 해당되는 위치라고 본다. 오기만 하면 뭐든 다해줄 것 같이 사근사근하던 사람들이 재계약 시즌이 되면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선득하게 변해버리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 매년 3월 1일 자로 시작되는 1년짜리 기간제 교사 계약서를 작성했었기 때문에 2월 중순이 되어도 의연하고자 했다.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
혹시 올해 결혼할 예정이신가요?
서른 살이 되어 면접에 들어가면 위의 두 질문은 꼭 받게 되었다. 합격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들어도 남자친구 없는 척을 했지만 면접의 대부분은 불합격으로 끝났다. 희망을 가지고 면접실에 들어갔다가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그 기분, 참담했다. 이딴 질문을 듣고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나도 참 구질구질해 보였다. 지금도 결혼 적령기의 기간제 교사 후보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마지막 기간제 교사 시절, 아이들도 너무 예뻤고 교직원들과의 사이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1년 더 이곳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정교사는 복직을 서둘렀다. 연말쯤에 나의 운명을 알게 된 거라 어찌 보면 운이 좋았다. 심지어 집 근처 어느 학교에서 한 학기 기간제 교사 자리가 날 것이란 속보까지 들었다. 그동안엔 1년짜리 기간제 자리만 갔었기 때문에 한 학기가 좀 짧게 느껴졌다. 하지만 경력이 있으니 2학기가 될 때쯤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곳으로 가는 것으로 휴직하실 분과 구두협의를 마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연초를 보냈다.
약속된 그곳에서의 면접일, 면접 분위기도 좋았고 내가 대답한 내용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합격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훗날, 날 그 학교에 다리를 놔줬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휴직하실 분 교실로 찾아가 인사드리지 않아서 널 불합격시켰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떨어졌다고 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내가 문제가 있어서 떨어진 게 아니란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약속된 곳에서 기간제 교사 최종 불합격을 한 뒤, 다른 면접자리에도 꽤 많이 갔다. 하지만 모두 들러리 신세였다. 항상 마지막엔 불합격을 했기 때문이다. 2월 마지막주가 되어서야 어쩌면 올해만큼은 3월 1일 자에 기간제 교사 계약서를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당시 난 월세를 청산하고 전세로 자취방 이사를 마친 상태였다. 당연히 이 지역에서 기간제 교사 생활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2월 마지막 주의 밤에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다시 공부만 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와 관련된 고민이 날 괴롭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생각의 실타래도 결국 끝이 있는 법, 다시 임용공부를 제대로 해보자고 결심을 했다. 경력 많고 일 가르칠 필요 없다는 나의 강점은 내가 결혼 적령기 여성이고 함께 일하기엔 고분고분하지 않은, 쓸데없이 경력 많은 기간제 교사 후보자라는 단점에 밀렸다. 몇 년 간 일하며 얻었던 반짝이던 나의 장점들이 순식간에 빛을 잃어버린 것 같아 슬펐다.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난 이제 이 시장에서 눈길이 가는 상품이 아니라는 것을.
딱 1년만 공부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동안 일한 덕분에 총알은 많았고, 하루 종일 쳐 박혀 공부할 집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난 더 이상 내 신세가 처량해 보이지 않았다. 기간제 교사를 하며 많은 것을 보고 먹고 즐겼기 때문이다. 그동안 충분히 놀아서인지 이제 공부만 해야 한다 할지라도 크게 억울하지 않았다. 나이 먹어 공부하는 것의 장점이 아예 없지 않네 싶어 허탈한 웃음이 났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백수생활이 시작되었다. 기간제 교사로 살아간 지 7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