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상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것이다. 오늘날 이 세상이 무자비하다면 우리의 무자비한 태도와 행동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변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을 바꾸는 것은 우리가 매일 쓰는 언어와 대화 방식을 바꾸는 데서 시작한다.
by
아룬 간디
시민운동가, 간디의 손자
거리에는 다양한 세계가 드나든다. 외모와 옷차림 그리고 걸음걸이와 표정 등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사는 세계를 추측한다. 그 추측은 언제나 들어 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보이는 너머의 세계는 그들을 직접 만나거나 함께 지내지 않으면 좀처럼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호감일 뿐이지 그 내면의 깊이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언어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해본다. 눈을 감아본다. 스쳐 지나가는 언어의 떨림을 잡아본다. 다양한 정보와 가십들이 감정선을 타고 입에서 귀로 연결된다. 적당한 톤 위로 흐트러지는 논리정연함은 봄날의 벚꽃을 보는 것 같다. 반면에 앞 뒤가 맞지 않는 주제와 전개 그리고 욕설이 난무하는 것들은 다시 먹기 싫은 음식 같다. 자연스럽게 둘은 분리가 된다.
각자의 세상은 서로 다른 이유로 형성되어 있고 어떠한 평가를 하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머물고 싶은 세계는 무엇인가로 물으면 답은 자명하다.
품위 있는 정치언어를 쓰고 싶어서 그래서 한 단어 한 단어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고 말한 어느 정치인의 어록에서 나의 세계를 반추해본다.
글을 쓴다는 것은 가장 익숙한 것을 가장 잘 다루고자 하는 욕구였다. 항상 곁에 두고 있기에 언어를 어떻게 하면 더욱 아름답고 근사하게 사용할 수 있을가 고민했다. 그것이 어쩌면 내 모든 존재의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언어에서 집약되는 나의 생각은 행동이라는 부산물을 만들어 냈고, 결국 어떤 특정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고민의 시간이 늘어날 수록 쓰고 말하는 것을 넘어 남의 이야기를 더 잘 듣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주 중요한 인지 체계의 전환이었다.
*
타자를 판단의 대상으로 여길 경우 동일성의 폭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나 처럼 되어라, 그러면 너의 차이를 존중해주겠다.”라는 동일성의 폭력으로 귀착한다는 말입니다.
by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나는 누군가를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흘러넘치는 말들은 대부분 누군가에 대한 뒷담화나 예찬으로 치닺는다. ‘그는 이렇기 때문에 그랬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되자.’ 이런 식의 구조는 동일성을 강요한다. 다같이 이렇게 되자. 우리는 열심히 삽을 들고 땅을 파는 근면 성실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상명하복식 설득이다.
보통의 폭력은 행동으로 드러나기 전에 이러한 언어적인 표명과 선언으로 시작한다. 행위는 이렇게 은밀하게 침투한 언어로 정당화 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언어가 쌓아 올린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세계의 출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언어들이 튕겨져 나가거나 흡수되는 현상을 통해서 우리 문명이 탄생했다.
여기서 나의 언어는 어떠한가 생각해본다.
나란 인간은 언어에 대해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가 생각해본다. 또한 나는 비겁하게 그 안에서만 숨어서 점점 매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반성도 해본다.
©️keyp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