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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루나무 Oct 29. 2020

의외로 힘든 날의 이야기

엄마와 같이 병원에 다녀왔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움직이는 것이 더 느리게 느껴졌다. 분명 씻고 나온 게 10시 12분인가 그랬는데 머리 말리기 전에 시간을 확인하니 11시 3분이었다. 기초 제품만 발랐는데 40분이나 걸리다니. 11시 40분에 예약해두어서 얼른 가야겠다 싶어 헤어드라이기를 가장 뜨겁게 해서 머리를 말렸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들렀다 가느라 병원에 11시 50분이 조금 넘어 도착했다. 다행히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전화해서 15분에서 20분 정도 걸린다고 말해둔 덕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진료를 받고 있었다.


사실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전에 이니스프리에서 일할 때 나도 모르게 자꾸 늦어서 지각하는 바람에 매니저에게 한 소리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는 그런 소리를 듣기 싫어서라도 일하기 20분이나 10분 전에는 무조건 가 있었다. 옷 갈아입는 시간도 고려해 더 일찍 도착해 여유롭게 준비하고 출근한 적도 많다. 지각할까봐 택시를 탄 적도 적지 않다. 그런데 도리어 그렇게 하다 차가 막혀 늦은 적도 있어서 만약 늦을 것 같거나 일이 생기면 미리 연락해 양해를 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생활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0분 일찍 오라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저 암묵적으로 늦지 말라고만 이야기할 뿐이었다. 솔직히 제 시간에 맞춰 도착해서 자기 일만 잘하면 되지,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다. 주방에 첫 출근하는 날 10분 일찍 출근했는데 왜 이렇게 늦었냐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왜 15분 일찍 안 왔냐는 것이다. 죄송하다고 하고 넘어가긴 했지만 첫 날부터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야기라도 계속 듣다 보면 잔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나. 그래서 그런 이야기조차 나오지 않게 방식을 바꿨다. 일단 맞추고 거기서 더 이야기가 나온다면 한마디 하리라 다짐하면서. 다행스럽게도 그 후로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그럼에도 이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이렇게 하자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상대방과 나, 즉 두 사람 간의 약속이라 할 수 있다. 약속이라는 것은 서로의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지켜야만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신뢰를 깨지 않을 수 있다. 하루는 누구에게나 처음이다. 그래서 누구도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만약 갑자기 일이 생기거나 피치못할 사정으로 가지 못하게 됐다면 연락을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다시 병원 이야기로 돌아가서 도착해 1시간 가까이 기다린 뒤 진료실로 들어갔다. 선생님이 잘 지냈냐고 물어봐서 화요일에 받았던 진단 검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결과와 수치에 대해 너무 크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저 지금 내가 불안정한 것이라 생각하라고 했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온 일, 진단 검사 때 왕따 이야기를 했더니 계속 생각나는 것, PMS(월경전 증후군)가 심한데 배란통이나 생리통이 있으면 식은 땀이 나면서 배가 살살 아프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눈물을 쏟았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참 힘들다, 그쵸?" 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호흡 곤란이 없었는지, 약은 괜찮았는지 물었다. 나는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는다고 했다. 호흡 곤란은 없었지만 예기 불안(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이 있었다고 했고, 선생님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집중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왕따 당했던 때의 이야기도 들려달라고, 정리할 필요는 있다고 했다. 지금은 너무 힘드니 생각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하라고 했다.


진료실을 나와서도 진정이 잘 되지 않아 엄마가 무슨 일 있는지 물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약을 받고 나와 떡볶이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눈물을 자꾸 쏟아서 진정하기 어렵다고 말해주었다. 다 먹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도 자꾸 생각나 힘이 들었다. 약국에서 약과 치약과 핫팩을 사고, 엄마가 화장실 간 사이에 갑자기 공황 증상이 살짝 와서 스스로 다독여주었다. 의외로 힘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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