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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루나무 Apr 16. 2022

나는 중고신인입니다

나는 중고신인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부산에 있는 한 호텔의 연회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 후 전단지 돌리기, 편의점, 홀서빙, 식당, 카페, 화장품 가게, 패밀리 레스토랑 주방, 마트 주방보조, 약국 전산 업무, 프라이팬 공장, 택배 분류, 회계 업무, 일반 사무직, 데이터 입력 아르바이트, 인터넷 서점, 번역 에이전시 등등 다양한 일을 전전해왔다. 일한 날은 하루부터 길게는 2년 2개월까지 다양하다. 지금은 아동보호기관에서 영어를 우리 말로, 우리 말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다. 또한 일본어로 된 영상을 우리 말로 번역하는 일을 준비하는 지망생이기도 하다. 


사실 책을 번역하는 출판번역가를 꿈꿨다. 하지만 내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처음 번역 학원에 갔을 때도 나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일본에도 살았고 일본어 능력 시험(JLPT) N1급을 고득점으로 딴 사람도 있었고, 우리 말을 잘하고 공부도 많이 하고 들어온 사람, 다른 번역 수업을 듣고 온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글을 써본 적도, 번역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 흔한 어학연수조차 다녀온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일본어 능력 시험 자격증은 N2급을 따고 들어갔다(1급과 2급의 수준 차이는 실로 어마무시하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지만 먹고살기 힘들어 휴학을 3년이나 한 탓에 일본어를 거의 잊어버렸기 때문에 1년도 채 공부를 못 했다. 지금이야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에 약국을 다니며 돈을 모아 4박 5일 오사카와 교토를 잠시 다녀왔지만, 그때는 그저 일본어와 책이 좋아 고등학교 2학년 때 번역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철없는 20대 후반이었을 뿐이다. 


수업을 들을수록 나는 작아졌다. 첫 수업부터 “첨삭을 못 해주겠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번역한 문장이 비문(非文), 그러니까 주어와 서술어가 맞지 않고 단어도 똑같은 게 두 개나 있어서였다. 듣자마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깐 쉬는 시간이 되어 옆에 있던 사람에게 웃으며 고칠 게 많은 것 같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차라리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그때 신이 나 하면서 번역을 했을까 싶었다. 잘하지도 못하면서 즐겁게 웃으며 한 게 후회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 자신을 몰아세우며 약국을 다니며 새벽 두세 시까지 공부하기 시작했고, 실력이 늘어 그나마 할 만해졌지만 몇 년 후 결국 출판번역을 그만뒀다. 


그러면서도 직장은 계속 바뀌었다. 부산에서 첫 직장을 다녔지만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본가로 다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일을 구한 건 정규직이 아니라 아르바이트였다. 2년이 넘게 버텼지만 정신적으로 힘들어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정규직은 꿈도 꾸지 못한 채 계속 계약직 생활을 했다. 3개월마다 회사를 떠났고 다시 새로운 회사에 들어갔다. 회사에 간신히 적응할 만하면 그만두게 되었다. 사람들과 친해져서 밥 몇 번 먹고 나면 이제 안 나온다는 인사를 했다.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사람들과 멀어져갔다. 정을 줄 만하면 그만두니 정을 주기도 애매했다. 하지만 세상은 좁아서 그만두더라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직장에서 친해졌던 사람들과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다.


지금의 위치에 서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 안에서 나는 수많은 중고신인 중 하나였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이 글을 쓴다. 간혹 정말 힘든 이야기가 적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써보련다. 내가 얼마나 힘들고 슬픈 나날을 견뎌왔는지,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인내심이 강한지,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이 많은지 생각하면 이 이야기를 가슴속에 품고 가기에는 좀 아쉬웠다. 수많은 중고신인 중 하나인 내가 이끌어나갈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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