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에브리띵 베이글

by 묘연한삶

분명 시간을 거슬러 이 이야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눈물범벅일 줄로만 알았는데, 신기하리만큼 남아있는 기억이 미세하다. 그럼에도 굳이 흐릿한 기억의 끄트머리를 따라가 본다.


5년 전 그날 밤, 하루와 나 그리고 엄마, 할머니, 이모가 우리 집에서 깊게 잠든 새벽이었다. 그는 별안간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소란을 피웠다. 나를 감시하고자 집에 설치한 CCTV를 발견하고 이혼을 요구한 후, 본격적인 조정기간 전까지 따로 살고 있는 상태였다.


어른들이 계신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순식간에 방으로 들어와 자고 있는 아이를 거칠게 어루만졌다. 왜 아이를 깨우냐며 저지하는 나의 가족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잘못한 건 쟤인데 왜 감싸주냐며.


맞다. 그의 말대로 나는 모두가 비난할 죄를 지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 봐도 답이 없는 것 같은 막다른 골목에선 앞뒤 재지 않는 미친 짓이 삶을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로 인해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 내가 아니었다면 겪지 않아도 될 그 지옥 같은 상황을 엄마와 할머니, 이모에게 겪게 했다는 죄책감은 오래도록 나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지난 2월 겨울 방학의 끝자락에 하루와 함께 클로버의 집에 놀러 갔다.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이 한데 뒤섞인 동네. 집으로 돌아오는 날 아침, 아이들의 부산스러움을 뒤로하고 혼자 산책에 나섰다. 그리곤 친근함이 느껴지는 선데이 빵집에 들어갔다. 낯익은 이름, 에브리띵 베이글을 집어 들었고 크림치즈를 고르게 발라 클로버와 반쪽씩 나누어 먹었다.


"If Nothing Matters, Then All The Pain And Guilt You Feel For Making Nothing Of Your Life Goes Away- Sucked Into A Bagel."



베이글 이름이 친숙했던 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때문이었다. 이 영화에서 에브리띵 베이글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메타포를 상징한다.


모든 것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허무함의 저편 끝에는, 여전히 이해와 사랑을 갈구하는 우리가 있다. 어떤 순간에서의 선택들로 인해 수없이 갈라진 가지 끝에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생이 무수히 달려 있다 해도.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우리 곁에 있는 사랑하는 존재들을 지키고 싶어서라는 걸.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이번 생을 살아갈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힘이 빠지는 날엔,

또다시 만나 베이글을 나누어 먹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