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산에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우산을 항상 들고 다니는 사람과 예보가 있을 때만 챙기는 사람. 또는 우산을 좀처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과 늘 우산을 새로 사는 사람. 나는 모두 전자다.
우산을 항상 챙기는 사람의 특징은 때때로 남들 보기에 미련한 짓을 한다는 점이다. 내 여행 가방은 수많은 ‘혹시나’로 가득해 지나가던 사람도 안쓰러운 눈빛을 보낼 정도다. 나는 짐을 나눠 쓰는 좋은 여행 동료지만 내 어깨와 허리는 나를 원망할 게 분명하다.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 보면 딱히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어쩌면 어릴 때 이사를 자주 다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생판 낯선 곳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최소치의 나를 계산하게 되었는지도. 지금까지도 회식 자리에 끼게 되면 일차에서 빠지고, 불필요한 번호는 저장하지 않고, 살가운 척하는 인사치레는 최대한 삼간다. 그게 나의 방식이고 내게 편한 나의 옷이다. 남 보기에 부자연스럽더라도 어쩔 수 없는.
말하자면, 나의 이사는 이런 식이었다. 엘피지 가스통이 즐비한 골목을 아이들이 뛰어 다니며, 집집마다 화장실이 없어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곤 했던 달동네에서의 어느 오후, 할아버지가 나를 찾는다. 엄마는 지금 일하고 있다고, 저쪽으로 가면 우리 외가라고, 걱정 섞인 눈빛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 뒤를 졸졸 좇으며 나는 말한다.
며칠 뒤에 나는 산골자락의 어느 리 어느 반 시골마을에 와 있다. 마당에서 지렁이를 잡고 가재가 사는 우물에서 물을 퍼 마신다. 골목에서 형, 누나들과 숨바꼭질을 하는 대신 혼자 동시를 쓰며 논다. 그런 이사가 얼마나 잦았는지 초등학생으로 다닌 학교만 다섯 군데가 넘는다.
어느 날인가 나는 처음 느꼈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그 어떤 조건이란 때로는 물건이고 때로는 태도였다.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했던 많은 담임선생님들과 내가 마음을 열지 못했던 수많은 반 친구들. 나는 일일이 잘 보이기를 포기한 사랑 받고 싶은 학생이었다.
나는 도시 아이들에게 촌놈으로 비치거나 분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서울 촌놈으로 비쳤을 거고, 나도 그런 내 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을 거다. 지금도 나를 두고 하는 웬만한 이야기는 걸러서 듣는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 필요한 적정량의 이야기가 있다.
이런 나를 두고 누군가는 마음이 닫혀 있다고 말한다. 사실 나는 누구보다 마음을 열고 싶다. 다치고 싶지 않을 뿐이고, 마음을 보여준 사람 앞에서 납치당한 것처럼 사라지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내가 살던 달동네는 재개발이 되어 사라졌고, 산골마을은 태풍에 수해를 입어 도망쳐 나온 뒤로 다시 가 보거나 그곳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바 없다. 장소들은 사라졌으나 그곳을 거친 나의 마음은 남아 있다.
언젠가는 가방 속의 우산을 꺼내 놓고 한결 가벼워질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