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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Oct 23. 2021

衣. [무라카미 T]와 불연속면 T

드라마보다는 르포를 담은 옷장

[무라카미 T]는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어디서 받았거나 얻었거나 직접 구입한 티셔츠의 사연을 소개한 에세이집이다. 하루키의 다른 에세이집이 그렇듯 맥주, 야구, 재즈, 마라톤 얘기만 하도 나와서 한 번 읽고 중고서점에 팔아버렸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몸서리치며 ‘이런 레퍼토리 이제 그만할 때 되지 않았어?’ 하면서도 이 작가의 신간은 아무튼 부지런히 사서 읽는다. 그렇다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싫어한다기보다는 역시 좋아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해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하기엔 어쩐지 부끄러운 감이 있다. 하루키가 너무 대중적인 작가라거나, 대중적인 작가를 좋아하는 건 진부하다거나 하는 이유에서는 아니다. 그보다는 30년 가까이 글을 써왔는데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저씨 정서를 억누르는 티조차 안 내는—이조차도 아저씨스럽다— 게으름에 질렸다고 하는 쪽이 맞다. ‘게으름’이란 건, 아저씨라 하기에도 좀 무리인 나이에 아직도 젊고 예쁜 여자 쌍둥이나 청순섹시한 여고생에 대해 쓰는 것 같은 걸 말한다.


아저씨 티셔츠에 관심이 없다 보니 [무라카미 T]가 딱히 재밌는 책은 아니었는데, 역시 저명한 작가는 옷에 대해 아무 글을 써도 잘 팔리는 거다. “아, 쫌!”이라고 하면서도 이 내가 꼬박꼬박 책을 사게 만드는 필력도 당연히 한몫을 했을 터이다. 반면 코트만 열 벌, 바지도 니트도 티셔츠도 카디건도 종류별로 열 벌씩 걸린 내 옷장의 사연은 정작 그리 화려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옷을 산 시기와 장소, 가격 정보를 전부 기억하고 있어서 자신 있게 말하자면 특별한 내막이 있는 옷은 다섯 벌, 아니 일곱 벌 정도… 그밖에는 대개 인터넷 아니면 오프라인에서 평범하게 값을 치르고 산 것들이다. 


하여도 내 옷장은 온전히 내가 번 돈으로 산 옷들로만 채워진 노동자의 옷장, 어른의 옷장이다. 첫 출근하는 딸을 위해 비상금 통장을 깨 마련한 정장, 환심을 사 어떻게든 독점적 연애 계약을 맺어보려고 12개월 할부로 그은 명품 가방처럼 드라마틱한 아이템은 그 안에 없다. 대신 내 옷장에는 허영과 실용주의, 패션과 환경, 사회적 규범과 취향, 주제 모르고 높은 안목과 워킹푸어의 빤한 지갑 사정 사이에서 고민한 결과물이 알차게 들어 있다. 드라마보다는 르포에 가깝다. 내가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도 그렇다는 점에서 마음에 든다. 에세이적 옷장을 가진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소설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는 건 구질구질한 드라마를 최소화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아, 『상실의 시대』는 물론 예외다.)


그러고 보니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 나온 옷들이 참 예뻤다. 『토니 타키타니』는 옷을 너무 많이 사는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토니 타키타니라는 인물에 관한 하루키 단편소설로, 하루키가 가라지 세일에서 산 티셔츠 한 장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하루키의 티셔츠에 얽힌 사연 중 가장 근사한 이야기다. 내 티셔츠들은 나한테 어떤 소설적 영감도 준 적이 없다. 다만 W컨셉에서 티셔츠를 수백 장 구경하는 건 좋아하는데, 거기 꽤 귀여운 티셔츠가 많지만 하나같이 북유럽계 개말라 모델들이 싫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구부정한 자세로 앉거나 서 있는 착용샷뿐이어서 사지는 않는다. 한때는 실물 옷이 아니라 입은 옷이 싫어 죽겠는 개말라 모델들의 이미지를 사면서 ‘옷을 산다’고 착각한 시기가 있었다. 그렇게 산 옷에 나는 애정을 쏟아부었다. 옷에 쓴 돈과 마찬가지로 그 애정도 나는 돌려받지 못했다. 그 즈음에 나는 「토니 타키타니」를 혼자서 두 번이나 보았다. 현재 내 옷장은 왜곡된 신체 이미지에서 해방된 자유인의 옷장이나, 울적할 땐 스크린을 가득 채우던 예쁜 옷들이 그 위에 겹쳐 보이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나한테 티셔츠는 2-3년에 한 번, 마음에 드는 것이 닳거나 늘어나 못 입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쇼핑에 나서야만 하는 아이템이다. 사실 나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다. 그전에 뭐 대단한 옷을 입었어서는 아니고 내 체형에 맞는 청바지 브랜드를 지금에 와서야 찾았기 때문인데, 프리미엄 진이라 가격이 부담되므로 유행이 정말로 돌고 돈다면 하루빨리 로 라이즈 진의 시대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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