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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Oct 20. 2021

衣. 소통은 됐고 정보나 주세요

라이브 커머스로 옷을 사는 것의 어려움에 대하여

나의 성장은 아날로그 시대 → 디지털 시대의 전환기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어릴 때 [미래에는 지금과 같은 시장이 없어지고 가상 공간에서 물건을 사게 될 것이다] 같은 공상과학적 미래 예측에 대해 “흥, 그래도 옷 같은 건 입어보고 사야지 어떻게 물건을 직접 보지도 않고 산단 말이야?”라고 잘난 척 말해놓고 커서는 이를 재고해볼 여지를 얻게 되었다는 뜻이다. 포스트 아날로그 세대의 진짜 즐거움은 “내가 어렸을 땐 말이야, 어? ‘온라인’이라는 단어조차 없었다고!”(진짭니다)라는 말로 디지털 네이티브를 깜짝 놀라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 문명과 함께 진보해 온 나의 인지와 학습 능력을 퍼뜩 깨닫는 데 있다. 여덟 살 때 ‘원격 장 보기’를 그토록 불신하던 나는 수백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성공률 95%를 자랑하는 인터넷 옷 쇼핑 달인이 됐다.


그런데 최근 이 성공률을 위협하는 존재가 등장했다. 바로 인스타 ‘라방’, 즉 라이브 커머스다. 최근에는 거의 빈티지 옷만 사는데, 빈티지 쇼핑몰도 물론 애용 중이지만 빈티지의 유니크함을 생각하면 인스타그램에서 운영되는 숍도 놓칠 수 없다. 그래서 몇 곳을 팔로우하기 시작했는데 DM도 아니고 라이브로 옷을 팔고 있는 거다. 사장님 입장에서는 시간을 미리 공지하기만 하면 그 시간에 옷을 한꺼번에 팔 수 있고, 옷마다 상세 사진과 정보를 업로드하고 여러 문의에 일일이 DM으로 답변하는 수고도 덜 수 있으니 라이브 판매를 안 할 이유가 없다. 라방으로 고객을 유입시키고 붙잡아두는 게 브랜딩에도 유리하다.


하지만 옷을 사는 입장에서 라이브 커머스에는 몇 가지 불편함이 있다. 우선 상세 사이즈를 알 수가 없다. 상의로 치면 나는 어깨 너비, 가슴둘레, 소매 길이, 전체 길이를 모르는 옷은 사지 않는다. 라이브 방송에서는 옷을 파는 분이 옷을 입고 “핏은 이래요, 언니들. 저는 55 사이즈예요. 자, 이거 사실 분?” 하고 물으면 30초 내에 누군가가 “저요” 하고 그걸 사 가 버린다. 잠깐만요, 55 사이즈에도 44 같은 55가 있고 정 55가 있고 통통 55가 있잖아요. 사장님 키가 170센티미터인지 150센티미터인지에 따라서도 똑같은 옷의 핏이 달라질 수 있다고요. 상세 사이즈를 물으면 친절히 대답은 해 주시지만 그전에 누군가 “저요” 해 버리면 내게 기회는 없다.


그리고 물건을 나란히 놓고 비교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보통은 ‘카디건이나 한 벌 살까...’ 하고 옷 구경을 시작하지 ‘레이스 컬러와 자개 단추를 포인트로 하는 아크릴 80% 나일론 20% 혼방의 레더 블랙 카디건을 사고 말겠어’ 하고 쇼핑에 임하지는 않지 않는가. 판매 중인 카디건이 열 벌이라면 창을 열 개 띄워놓고 컬러와 소재와 사이즈와 디테일과 활용도를 비교 분석해서 그중 마음에 드는 걸 사고 싶단 말이다. 그러나 라이브 방송에서는 ‘음, 이거 예쁘긴 한데 저 뒤에 걸려 있는 파란색 털실 카디건도 보고 결정할까’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저요” 한다. 저기요, 정말 그 옷으로 결정하실 거예요? 뒤에 나올 옷이랑 비교해 보고 싶지 않아요? 이 “저요”가 주는 텐션 때문에 결국 나도 뭐 하나든 건져야겠다는 오기가 생기는 게 라이브 커머스의 마력이긴 하다.


라이브 커머스란 게 뜨기 시작했을 때, ‘그냥 케이블 TV에서 하던 홈 쇼핑 아니야? 고객이 실시간 채팅으로 참여할 수 있는?’이라고 생각했는데—그리고 여덟 살 때 그랬던 것처럼 ‘누가 아직도 그렇게 옷을 사’라고도 생각했다, 진보한 듯 진보하지 않는 학습 능력이여— 그 실시간 참여 부분이 포인트였다. 그게 소통을 중시하는 MZ 세대의 취향을 저격했다고. 과연 인스타 라방도 들어가 보면 사람들이 옷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 심지어는 서로 싸움까지 해서 종종 방송을 중단시킨다. 나한테는 이것도 라이브 커머스의 단점인데, 나는 옷을 사러 왔지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닌 것이다.


MZ 세대가 소통을 중시한다는 것도 그렇다. ‘소통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오해가 없도록 서로 뜻을 통하다’다. 이걸 ‘상호작용’이나 ‘커뮤니케이션’으로 넓게 해석하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소통’의 본래 의미에서 ‘서로 뜻을 통하다’에 방점이 찍힌다면 그렇게 해석해도 맥락은 같겠으나 ‘오해 없음’에 방점이 찍힌다면 그건 상호작용과는 좀 다른 거 아닌가 싶다. MZ 세대가 소통을 중시한다 하니 억지로 대화를 시도해 놓고 이쪽의 노력을 몰라준다며 혼자 서운해하는 직장 상사들은 이 부분을 잘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해가 결여된 대화는 ‘소통’이 아니다. 라이브 커머스에서도 나는 MZ 세대 고객들이 꼭 옷 가게 사장님과 오해가 없도록 서로 뜻을 통하고 싶어서 라방을 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 착용샷을 보면서 옷에 대한 정보를 바로 얻을 수 있고(편리함), 채팅에 참여하면 사장님이 반응해주니까(관심) 보는 거지. 경쟁자를 제치고 먼저 “저요” 하는 쾌감에 중독된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55 사이즈라고 다 같은 55 사이즈가 아니듯, MZ 세대라고 해서 다 같은 MZ 세대도 아닌 것이다.


나는 편의에 따라 X세대로도 밀레니얼 세대로도 분류되나 본데, 쇼핑을 할 때 남에게 이해받거나 남과 상호작용하고 싶다는 니즈는 1도 없다. 그보다 옷의 사이즈와 소재와 세탁 정보를 최대한 정확하고 상세하게, 가능하면 끝내주는 필터링 기능과 함께 제공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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