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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Jan 04. 2020

衣. 소박함을 상징하는 직물

[아그네스 그레이]와 올콧의 교육 소설들

현대문화센타에서 출간된 앤 브론테의 [아그네스 그레이] 뒤표지에는 “한 벌의 머슬린 드레스 같은 소설!”이라는 평이 실려 있다. 책이 2단 3단으로 꽂혀 더 이상 원하는 책을 찾기도 어려워진 내 책장에서 이 책은 분실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이므로, 기억력에 의존해 쓰자면 틀림없이 그렇다. 느낌표도 틀림없이 붙어 있었다. 그 비유가 21세기 한국인에게서 나왔을 법하진 않으니, 당대의 비평가가 한 말을 인용했을 것이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소설의 분위기와 결말로 미루어보건대 그것은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고 정갈하다”라는 말을 대신해 쓰인 찬사였다. 과연 기품 있고 정갈한 소설이긴 했는데, 나중에 다른 데서 언뜻 앤 브론테가 언니들인 샬럿이나 에밀리를 능가하는 천재였었다는 이야기를 본 것도 같다. 그 출처 또한 나의 시원찮은 장기기억 어딘가에 파묻혀 있다.



더 어린 시절에 읽었던, 루이자 메이 올콧의 [An old-fashioned girl](지경사 소녀소설판 제목은 “내 사랑 폴리”였다)에도 머슬린 드레스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시골마을 출신의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소녀, 폴리가 어떤 파티에 입고 가기로 결정한 것은 한 벌의 하얀 머슬린 드레스였다. 그녀의 도시 친구 파니가 입은, 실크 또는 프릴 또는 그 두 개 다로 이루어진 화려한 드레스에 비하면 폴리의 옷은 수수하기 짝이 없었다. 이에 이 겸손한 소녀의 선택을 높이 산 파니의 할머니가 폴리에게 머슬린 드레스를 한결 돋보이게 해줄 앤티크 로켓(이었나 브로치였나)을 선물해 준다는 얘기였다.


구글링을 해보니 머슬린은 영국에서는 얇은 면직물을, 미국에서는 튼튼한 면직물을 가리킨단다. [아그네스 그레이]의 보조관념과 폴리가 입었던 드레스는 약간 다를지 모르겠다. 해도 두 경우 모두 “흔하고, 광택도 없고, 세탁도 손쉬운 머슬린의 실용성과 소박함”을 미덕으로 간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그네스 그레이는 부유하고 허영심 많은 연적을 제치고 원하는 사랑을 손에 넣는다(는 결말이었다, 아마도). 폴리는 그녀만의 수수한 매력으로 한때 파니가 눈독을 들이던 시드니의 마음을 사기도 했었지만, 엔딩에서는 수수한 소녀다운 결말로 어린 시절 친구인 톰과 맺어진다. 과연 사치스러운 옷은 2세기 전에도 헤테로 남성들에게 인기가 없었나 보다.


그래서 19th century muslin dress라는 키워드로 또 다시 구글링을 해 보니 현대의 기준으로 수수하고 소박하다고 하기에는 과하게 샤랄라한 옷이 나왔다.


*


여튼 나한테도 머슬린 드레스라고 할 만한 옷이 한 벌 있다.

21세기적 감수성으로는 수수하지도 소박하지도 않은 옷이다. 15년쯤 전에 올리브 데 올리브에서 산 면 레이스 원피스인데, 그때도 30만원 넘게 주고 샀으니 가격 면에서도 결코 수수하지 않았다. 과외비가 나오기 한 주 전에 매장에서 그 드레스를 보고 망설이다 결국 시착을 했다. 가볍고 서늘한 면사가 기분 좋게 피부를 감쌌고 밑단이 세심히 처리된 치맛자락이 무릎 언저리에서 찰랑거렸다. 심지어 사이즈도 꼭 맞았다. 실제로 그 옷이 내게 잘 어울리기도 했거니와, 그래서 그 옷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는 것을 간파한 점원은 만면에 희색을 띠며 내게서 그 옷을 받아들었다.


“이 옷, 너무 예쁜데 제가 지금 돈이 없어서요... 다음주에 사러 와도 있을까요?”


옷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예쁜 옷을 입고 싶어 하는 마음이 뭔지도 안다. 올리브 데 올리브의 점원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 점원은 상냥하게, 옷 가격의 10%만 지불하면 일주일 후 내가 남은 돈을 들고 올 때까지 옷을 맡아 두겠노라고 했다. 그다음 주 과외비 봉투와 쇼핑백에 고이 담긴 옷을 맞바꾸고 백화점을 나서는데 분수를 넘어도 한참 넘은 소비를 한 주제에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폴리도 머슬린 드레스로 승부해서 파니 할머니의 앤티크 로켓을 받았을 때 비슷한 기분이었겠지.

이런 류의 충동 구매가 가져오는 인과응보적 결말로, ‘하지만 그렇게 산 머슬린 드레스는 입을 일이 좀처럼 없어 옷장에 걸어만 두다가 이사할 때 정리해 버렸다’는 이야기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옷을 여름마다 꺼내 입었고 그걸 입고 외국 여행도 다녀왔고 지금까지도 잘 입고 있다.


21세기 극동아시아에서 modesty의 상징은 MUJI 스타일의 오버핏 리넨 원피스지 싶다. 튼튼하고 실용적이고 색상도 무난해서 학생이고 직장인이고 데일리로 입기 좋다. 정작 MUJI 옷들은 한국에서는 좀 비싸게 팔리고 요즘 시국에는 인기도 없지만 그 비슷한 옷을 보세에서는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 근데 내가 심혈을 기울여 쓴 단 한 편의 소설이 “한 벌의 MUJI 리넨 원피스 같은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는다면 미묘하겠지.


*


19세기 영국 젠트리 계급이나 미국 상류층의 관점에서 머슬린 드레스가 소박함의 상징이었다면, 그것을 입은 여성 또한 참하고 수수한 취향과 인격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암묵적 요구가 있었고 나아가서는 그게 여성 전반에게 기대되는 미덕이었다. 루이자 메이 올콧의 실용적인 옷 예찬은 [사랑스런 소녀 로즈와 일곱 명의 사촌들(원제: Eight Cousins)]에서도 이어지는데, 병약하고 새침하고 어여쁜 소녀 로즈에게 알렉 삼촌이 허리를 조이는 화려한 옷 대신 실용적인 플란넬 옷을 입히는 장면은 어린 마음에 읽기에도 불편한 지점이 있었다. 어린 소녀의 허리를 죄는 것도 통제지만, 어떤 선택권도 주지 않고 어른 남자 취향에 맞는 옷을 입으라는 것도 통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몇 년 후에야 명료하게 깨달았다. (플란넬을 권한 것이 어른 남자가 아니라 또래 소녀였다면 불편하지 않았을 텐데.)


어릴 때는 [작은 아씨들]이니 [내 사랑 폴리]니 [사랑스런 소녀 로즈와 일곱 명의 사촌들] 같은 시리즈를 그렇게 재밌게 읽었었는데, 좀 크고 나서는 여전히 재미있는 작품들이긴 했어도 ‘소녀는 모름지기 참하고 수수해야 하며 그래야 시집 잘 간다’는 주제 의식이 마음에 안 들었었더랬다. 그런데 거기에도 반전이 있었다. 몇 년 전에 [가면 뒤에서]와 [초월주의의 야생귀리] 같은, 루이자 메이 올콧의 진가를 알 수 있는 책들이 국내에 소개됐는데, 올콧은 소위 [작은 아씨들] 같은 소녀 교육소설이 부모들에게 잘 팔려서 썼을 뿐이고 실제로는 거기서 가르치는 교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후로 내가 올콧의 작품을 더 좋아하게 된 것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야 어떤 여자애가 파티에 머슬린 드레스 같은 걸 입고 가냐’라고 속으로는 혀를 차면서 펜을 쥔 손으로는 실로 능수능란하게, 시골 소녀 폴리에 대한 애정을 담아, 폴리가 머슬린 드레스 한 벌로 노부인의 호감을 사서 작은 보석 하나를 마침내 얻게 되는 이야기를 집필하는 올콧을 생각하면 나는 즐겁다. 또 실제로 작가는 빈곤한 생활을 했었다고도 하니 스스로도 “소박함, 간소함, 겸허함”에 대한 양가 감정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유함과 사치스러움을 경멸하는 듯하면서도 동경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적확할 수는 없었을 것 같은 필치로 그것을 묘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머슬린이라는 직물은 더 이상 강력한 상징성이 없지만, 그것이 더 저렴한 제품을 대체할 때에는 또 얘기가 다르다. 몇 년 전 고급 차 브랜드를 취급하는 티룸이나 커피숍마다 마리아쥬 프레르를 들여놓는 게 유행한 적이 있다. 차 품질이 좋기도 했겠지만 티백이 종이가 아니라 머슬린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그 브랜드가 고가 전략을 펼치게 된 배경 중 하나였다. 나는 평범한 허영심의 소유자라 그걸 또 한 상자 정도는 집에 구비해놔야만 직성이 풀렸었더랬는데, ‘그래서 힘들게 프랑스 직구까지 한 차를 좀처럼 마실 기회가 나지 않아 두세 번 맛만 보고 나중에는 향이 사라져서 버리게 됐다’라는 이야기를 선호할 사람이 역시나 또 있겠지만 그해 겨울 마지막 티백 하나까지 알차게 우려먹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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