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in Jun 11. 2024

한 여름의 노을

8월의 제주도에서 환상적인 노을을 본 적이 있다. 몇 년 전 일인데 아직도 인상적일 만큼 다채로운 색깔의 구름과 어스름하게 푸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참이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름의 노을이 불꽃놀이 같다면 겨울의 노을은 차분하게 타들어가는 장작 같아. 친구의 표현인데 문득 창밖을 봤을 때 해가 지고 있으면 그 말이 생각난다. 


어떤 계절의 노을이던 나는 해가 떠오르는 시간보다 지는 시간을 더 좋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해가 뜰 무렵이 사회적인 시간이 시작되는 시간대라면 해가 지는 시간은 개인들의 시간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일출은 흐릿하게 떠오를 때도 있지만 일몰은 선명하게 진다. 서서히 밝아지는 풍경보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는 시간이 시각적으로도 훨씬 매력적이다. 

어쩌면, 아마도 지금이 인생에서 한 여름의 노을 같은 시간이 아닐까 싶다. 

청년의 끝자락에 서서 찬란했던 계절을 돌아봤고 이제 수확의 계절을 기다리면서 준비를 마쳐야 하는 때가 온 것 같다. 


영화 <소공녀>의 미소는 다 잃어도 포기할 수 없는 취향이 있는 사람이다.

집은 없어도 취향과 생각은 있는 사람. 그녀는 정말 자기가 한 말대로 그렇게 산다.

하루에 4만 5천원을 벌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만삼천 원어치 위스키를 마시면서, 사천오백 원짜리 담배를 피우면서. 그리고 요즘은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면서 자기의 오두막에 기꺼이 불을 지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 

사랑하는 것들을 잃지 않으려 혹은 절실하게 찾으려 모든 것을 포기한 그들처럼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살 수 있대도 그만큼 사랑하며 지킬 것은 또 무엇인가.


겨우 4줄짜리 일기장을 채울 시간을 갖지 못하는 날들은 나를 서글프게 한다. 

새 집에 가서 맞이할 계절들이 기대된다.

편하게 독서할 수 있는 1인용 소파를 놓고 베란다에서 식물을 기를 생각을 하면 설렌다. 

풍선이 부푸는 것처럼 벅차서 당장 그 시간으로 뛰어가고 싶다.

한 여름이 되면 많이 달라져있을 일상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근미래를 기쁘게 상상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파고드는 법에 대해 배운 것이 이 시기에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멈추지 말아야지. 

그리고 앞으로도 매일 달라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이전 19화 정직하게 사는 게 하수인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