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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엽 Jun 27. 2021

임금 '정조'가 아닌 인간 '이산'을 엿보다.

<정조 어찰첩> 정조와 심환지가 비밀리에주고받은편지

이처럼 정조는 자신의 감정을 편지를 통해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급하게 써야 했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 정조 자체가 입이 매우 거친 사람이었다.

2000년대 중반쯤 한창 정조 암살설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덕에 한동안 정조를 소재로 한 책이나 드라마, 영화가 쏟아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걸로 기억난다. 그때는 내가 아직 어리고 그런 것에 관심이 덜하던 때라 그 이유를 몰랐는데 후에 알게 됐다.  


바로 이 서찰집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정조가 한 당파의 수장급 인물과 비밀리에 주고받은 편지다. 정조 암살설이 한창 화제가 됐을 때 그 유력한 배후로 꼽히던 인물은 노론과 이를 이끌던 심환지였다. 그런데 정조가 편지를 주고받은 인물이 바로 심환지였던 것. 이 편지를 통해 겉으로는 대립하는 관계였던 그들이 사실은 일종의 정치적 파트너인 것이 드러남으로써 정조 암살설 주장은 완전히 힘을 잃었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  당시 OCN 채널이 야심차게 준비한 채널 자체 드라마여서 모든 CJ 채널에서 지겹게 광고가 나왔었다.

<정조 어찰첩>은 정조가 반대파인 노론 벽파의 수장 심환지에게 1796~1800년 사이에 보낸 서찰을 묶은 것이다. 정조와 심환지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서찰을 주고받으며 비밀리에 교류했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그렇지 않은 척 연기했다.


<정조 어찰첩>에선 인간 이산의 날 것의 감정을 엿볼 수 있다. 평소에도 그렇게 욕을 많이 했다던 말버릇은 어딜 가지 않아서 '호로자식'이나 '젖내나는' 등의 정제되지 않은 용어를 그대로 쓰기도 하고, 한자로 옮길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 '뒤쥭박쥭'이라는 단어를 한글 그대로 쓰기도 했다. 또한 당시의 채팅용어(?)도 엿볼 수 있다. 정조는 웃을 때는 呵呵(하하)를 음을 따서 사용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ㅋㅋㅋ랑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극한의 꼰대였던 정조가 자기보다 스무 살 넘게 많은 심환지에게 이런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왕이라서'. 또 하나는 이 서찰이 애초에 다른 이들도 읽도록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조는 서찰에 자주 '이 서찰은 읽고 바로 태워라(번 애프터 리딩)'라고 적어놨는데 심환지는 마치 '이건 적지 마라'한 걸 기어이 '왕께서 이건 적지 말라고 하셨다'라고 기록한 사관처럼 다 보관해뒀다. 사실 그도 당연할 것이 언제 편지 내용이랑 딴 소리할지 모르니 보험용으로라도, 또한 임금이 밀실정치를 행했다는 증거로도 이 서찰은 보관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이걸 보관한 덕에 후세에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쓸 뻔한 것도 막았으니 심환지로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또한 이 편지가 심환지의 정조 암살설을 완벽히 반박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매 편지마다 정조가 자신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죽는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온갖 성인병을 달고 살았고 말년에 들어 갈수록 탈 난 곳이 많았다. 실제로 서찰에서 정조가 호소하는 증상들이 정조가 당시 앓고 있던 병의 증상과 동일하다고 한다. 자기보다 스무 살 넘게 많은 노인에게 지 몸 아프다고 우는 소리를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왕이라서 그렇다.


정조가 보내는 편지는 대개 이런 패턴이다.


'~ 잘 있었는가?

나는 어디가 아프고, 어디가 쑤시고 어디가 탈이 나서 죽겄다 ~


요사이 소식(뉴스)은 어떠한가? ~~

(대충 요즘 이런 일이 있는데 신하놈들이 하여튼 내 말은 오지게 안 들어서 임금짓도 못 해먹겠다. 근데 너는 도대체 뭐하고 앉았냐? 내가 속이 터지기 전에)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이만 줄인다.'

정조가 쓴 편지의 일부로 한글로 '뒤쥭박쥭'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러한 내용을 접하고 무겁기만 엄숙하기만 했던 정조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었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 서찰집의 발견으로 조선시대 역사기록물에 대한 기존의 접근을 바꿀 필요가 생겼다. 서찰집 발견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심환지가 정조 암살설의 배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조와 대립하던 사이라고 알아왔다. 기존의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물에서는 그렇게 적혀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 비밀 서찰집은 조선시대, 아니 최소한 정조 시대에는 당파 싸움의 와중에도 밀실 정치를 통해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료인 것이다. 더군다나 그 주체가 다른 이도 아닌 임금이다. 늘 호위와 동시에 감시를 동시에 받고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기록에 남기도 한 임금도 그럴 수 있는데 다른 이들은 오죽하랴. 기존에 분석해놓은 역사적 사실이 실제로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이 어찰첩의 발견은 정조 암살설이라는 음모론을 반박하는 자료기도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수많은 음모론을 탄생시킬 수도 있는 자료인 셈이다. 역사가 재밌는 것이 이거다. 이미 애진작에 벌어진 일인데 우리가 무엇을 통해 어떻게 분석하는지에 따라 그 구성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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