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 땅의 논문 쓰는 자들을 위한 공감과 치유의 에세이

by 서수

나는 미학을 전공했다. 학부에서, 그리고 대학원에서.


인문학에는 여러 전공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철학이나 미학을 선택했다는 것은 얼마나 내가 취업에 대해서, 졸업 이후의 냉혹한 사회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는지를 방증한다. 역시나 나는 아무 대책 없이 졸업 유예도 하지 않고 어학연수로 한 학기 휴학한 것을 제외하고는 4년 6개월 만에 졸업을 하고야 만다. 취업은 졸업을 하고 난 뒤부터 준비하였고 물론 그 결과는...대학원에 진학했다는 것으로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말하고 싶다. 게다가 동일한 전공으로 대학원을 오게 되었다는 것 또한 여전히 내가 취업의 쓰디쓴 실패를 현실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을 대신 설명해 줄 것이다.

물론 내가 미학이라는 학문에 대해서 전혀 흥미가 없었거나 억지로 선택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이 학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누군가는 먹고 살 걱정 없는 사람들이나 관심 가질 만한 교양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나, 생각보다 대학원에는 먹고 살 걱정을 누구보다 강하게 하며 근근이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이 더 많다. 왜 그렇게까지 고생을 하면서 이 학문에 매달리는 것인지를 더 궁금하게 하는 사람들이. 나도 그중 하나였고 말이다.

아무튼 앞에서도 간략하게 서술한 나의 안일한 태도가 설명해주듯이 대학원 진학 또한 나는 꽤나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텍스트를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 것 정도라고 생각한 대학원 생활은 학위 논문을 써야 한다는 그 강한 압박이 사실상 100% 지배하고 있는 세계였고, 나의 모든 공부와 사색과 심지어 온 생활까지 학위 논문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로 귀결되는 세계였음을 나는 또 대학원에 진학하고 난 뒤에야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다, 논문.


나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총 2편의 논문을 썼다. 모두 졸업을 위한 논문이었다. 학부 시절 졸업논문은 사실상 레포트 수준에서 조금 더 발전시킨 것이었고 졸업에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형식적인 논문이었다.

그리고 석사학위논문.

학위논문을 쓰고 졸업하기 전까지 나는 과연 내 인생에 이렇게 넘기 힘든 산이 또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골백번 하곤 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에서 쓰라린 실패와 상처가 제각기 있기 마련인데 나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취업의 실패보다 학위논문을 쓴다는 것, 그리고 이 논문으로 졸업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훨씬 더 큰 고난이었고 과한 태스크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내가 이걸 쓰고 졸업할 깜냥이 있는 사람인가', '지금이라도 교수님께 말씀드리고 중단할까'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회의와 후회와 실망과 비난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회의가 거세지는 만큼 반대급부로 '이건 꼭 해내야만 한다', '인생에서 이런 산을 넘지 못하고 회피한다면 내 인생에 가장 큰 후회로 남을 것이다' 등의 다짐은 더 커져만 갔다. 한 마디로 등 뒤로 거대한 절벽이 있는 낭떠러지에 나는 서 있었던 것이다. 내 앞에는 논문이라는 괴물이 다가오고 있어 절대 뒤로 갈 수 없고 무조건 이겨내야만 하는.


이 논문일기가 박사학위논문을 쓰는 과정에 대한 에세이가 아닌 것이 내가 정신을 차렸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이 과정도 이렇게나 고통스러운데 박사과정은 어떨지 감 조차 잡히지 않는다. 나는 논문을 쓰던 지난한 시간 동안 이 과정들을 함께 겪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공감할 수 있고, 이 공감을 통해 고통들이 잠시나마 치유될 수 있는 에세이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는 무사히 논문 심사를 통과하고 졸업을 하였고, 이렇게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2016년 8월에 졸업을 했다. 그때 생각으로는 에세이를 금방이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생각처럼 글을 다시 쓴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논문을 쓰기 위해 글을 읽고 글을 썼던 그 시간들이 고통스러워서 차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느 직장에 계약직 사원으로 들어갔고, 글을 읽고 쓰는 모든 행위로부터 조금 멀리 피해 있었다.

지금이 2018년 2월이니 꼬박 1년 6개월이 걸린 것이다.

그리고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은 석사 코스웍에 걸린 2년을 제외하고 오로지 학위논문만을 위해 할애한 시간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벗어난 내 외부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것이다. 이 공간이 나만 볼 수 있는 내 일기장이 된다고 하더라도 한번 나를 벗어난 글은 결코 지금의 나와 동일할 수 없으므로 이제부터 내가 쓰는 모든 글은 나이기도 하지만 진정으로는 내가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자 한다. 내 것이 아닌 이 글이 어디에 가 닿든,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리든 내 손을 벗어난 일이다. 이 글에게 자유를,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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