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의 순간

결국 주제는 내 안에 있다

by 서수

내가 다다른 곳은 '공동체'라는 키워드였다.


공동체를 흔히 '공동'의 목적을 가지거나 '공동'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어떤 집단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런 공동체에는 어릴 때부터 몸서리를 치며 거부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그것이 '가족' 혹은 '친족' 공동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은 참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이나 그룹에 소속되거나 소속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그 자리를 피하곤 했다. 초중고교 시절에도 뭔가 단짝을 만들어야 한다는 학기 초에 특유의 긴장감도 싫었다. 처음에는 여러 사람과 두루두루 지내다가 정말 마음이 맞는 사람을 발견해서 그 사람과 더 친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처음부터 화장실도 함께 가는 단짝이 필요해서 꼭 만들어야만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타의에 의해 한 반을 이루어야 하는 초중고교 시절을 지나 모든 것이 자율적이었던 대학 입학 초기에는 아웃사이더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동아리든 학회든 심지어 학과나 과반이든 어떤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내가 자발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그 상황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어떤 '수장'이 존재하고 그 수장의 성격이 공동체 전체의 성격이 되어 버리는 수직적인 공동체를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물론 내가 그만큼 노력을 해야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은 맞다. 다만 나는 내 성격을 죽이고 그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애쓰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혼자 있는 것만을 즐긴다거나 단체생활을 못하는 성격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어떤 그룹에 들어가면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고 스스로 망가지면서까지 얼어 있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더 큰 사람이다. 다만, 타인과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좋아하지만 거기에 종속되는 것은 싫어하는 이 모순이 내 안에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리고 그 주제를 발견한 것이다.

공동체, 그러나 무위의 공동체.


무위의 공동체(La communauté désoeuvrée)란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Jean-Luc Nancy)의 개념으로, 하나의 정체성 혹은 동일성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전체주의적 공동체(그에 따르면 신화적 공동체)의 바깥에서 이를 해체하는 공동체이다. 전체주의적 공동체의 기반에는 '민족', '인종', '이념', '성' 등과 같은 본질주의에 입각한 동일성이 있어서 그와 다른 공동체를 배제하고자 하는 반면, 무위의 공동체는 너와 나, 우리 '사이'의 수평적 '존재' 자체를 공동체(낭시에게 있어서는 공동-내-존재라고 표현된다)라고 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수직적인 전체주의적 공동체를 결코 이룰 수 없다. 그리고 낭시에 따르면 이 우리 '사이'의 존재는 평소에는 의식할 수 없다가 오직 '타인의 죽음'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드러난다. 내가 세계 안에서 관계하는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오직 타인의 죽음인데,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나의 죽음을 알 수 없으며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만 내 존재가 유한하다는 것을 보증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그 자체로 공동체적 사건이다.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세계 안에서 더불어 사는 존재인 한, 나와 관계되는 유일한 죽음은 타인의 죽음이라는 것이 낭시의 주장이다.

물론 이 '타인의 죽음'은 실제적인 죽음을 곧바로 가리키진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누군가가 지금 내 옆에서 숨을 거두어야 공동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매우 폭력적인 사유인 것이다. 낭시에게 있어 '죽음'은 늘 실존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죽음은 단순히 생물학적 단명을 의미하지 않으며, 존재의 무, 즉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의 가능성의 상태를 가리킨다.

전체주의적 공동체는 우리 주위에 흔히 보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타인의 죽음에 의해 드러나는 우리 '사이'의 존재라는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워서 몇 날 며칠, 아니 몇 달 동안을 그 한 문장을 붙들고 얼마나 씨름했는지 모른다. 포기할까 싶을 정도로 내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개념이었는데, 어느 날 이 문장이 나에게 실제적으로 다가왔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타인의 죽음이 생물학적 단명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의 가능성의 상태가 현실적인 상태로 다가왔을 때에도 낭시가 말한 공동체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 다시금 이 주제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교회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하던 언니가 있었는데 갑자기 그 언니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나는 내 나이 또래의 누군가가 사망했던 적이 없어서 친한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그 소식에 망연자실해졌고 그다음 날 바로 장례식장에 갔다.

사인은 교통사고였다. 장례식장에서 그 언니의 지인이 가지고 있던, 사고 당시의 액정이 깨져 있는 휴대폰을 보았다.

그때 나 자신의 일부도 사라진 것 같았다. 타인의 죽음이 나에게 그렇게 큰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은 나에 대한 기억을 가진 타인이 죽음으로 인해 나 자신의 일부분도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언니의 존재의 소멸과 동시에 나의 존재도 소멸되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함께 공유하며 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어떤 지속적인 연결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연결의 존재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사이'의 존재가 바로 낭시적 의미의 공동체라는 것을 고인을 기리며 깨닫게 되었다.

어떤 이익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 아니라, 그래서 그 목적을 이루고 정체성의 강화를 빌미로 그와 다른 공동체를 배격하고 혐오하는 공동체 아니라, 우리 사이에 타인의 죽음을 매개로 존재하게 되는 그 무위의 공동체.


나는 이 공동체 개념을 동시대 공공미술에서 흔히 나타나는 공동체 미술의 한계에 적용하고자 했고, 이 개념을 통해 공동체 미술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주제를 확정 지었다. 나의 삶이었지만 내 안에서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을, 난해하기는 해도 몇 가지 단어로, 이론으로 정리해 준 철학자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이 고단한 논문의 길을 가는 데에 그는 나의 영혼의 파트너가 돼 주었다. 그를 만난 순간이 나에겐 환희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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