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

주제를 찾아서 기쁘다? 이미 누가 써놓은 걸 발견하고 슬프다

by 서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쓰고 싶었던 주제가 아닌, 논문을 위한, 논문에 의한, 논문의 주제를 닥치는대로 떠올려본다. 마치 하나의 수학 공식마냥.


서론에서는 이론을 요약하고 이 이론을 예술작품에 어떻게 적용할지 요약한다. 본론은 총 3장으로 구성하는 게 좋다. 1장은 이론 분석, 2장은 이론과 예술작품 분석 사이의 브릿지, 3장은 이론을 통한 예술작품 분석이면 좋겠다. 결론에서는 논문의 의의와 한계점을 자평한다.


이 공식에 맞게 x항과 y항에 내가 이제껏 수업을 들었던 이론가들과 수업 텍스트에서 보았던 작품들을 끼워 맞춰본다. 하나의 대명제를 설정하고 그에 맞춘다기보다는 선 구성, 후 스토리텔링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형화된 구성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안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은 한계가 있다. 구성이 문제가 아니다. 뼈대가 그럴싸해도 서론-본론-결론, 본론 내 1장-2장-3장의 내용이 연결되는 데에 논리에 결함이 있으면, 개연성이 떨어지면 설득력이 부족해진다. 설득력이 없는 논문은 아무도 읽지 않는데, 읽을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어찌어찌해서 겉보기에 그럴싸한 주제를 만들어내고선 혼자 흡족해한다. 사실 이 단계에서는 공부가 그렇게 깊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겉보기에 그럴싸하면 뭔가 이루어낸 것 같고, 될 것 같고, 졸업할 것 같은 정신승리에 이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논문 DB에 키워드를 검색하면 이미 여러 명의 저자가 제목과 소제목만 다른 비슷한 내용의 학위논문, 학술논문을 많이도 써 놨다. 기존 연구자들이 여러 차례 울궈먹은 주제는 내가 그들의 한계를 뛰어넘을만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첨가하지 않는 이상 연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골머리를 썩어가며 주제를 끼워 맞추다가 겨우 짜깁기를 해서 기뻐하고, 이미 선점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곤 슬퍼하며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기를 몇날 며칠 이어간다. 그러다 갑자기 의문이 든다. 운이 좋아서 주제를 발견했다손 치자. 그런데 공부를 하다가 그 이론가가 말한 게 이게 아니라면? 그때되서 '이 산이 아닌가벼' 하고 다시 주제를 찾아 헤맬 것인가? 어쨌든 주제보다는 내가 읽고 싶은 텍스트를 먼저 공부하고 그 텍스트 안에서 주제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또다시 학위논문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책을 편다. 인문학은 내 꾀가 통하지 않는, 시간과 엉덩이의 정직한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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