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수 Mar 17. 2021

개를 애보다 사랑했던 시절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여보, 나 큰일 났어."

"왜?"

"뱃속에 있는 아기가 태어났는데 제리보다 안 이쁘면 어떡하지?"


험블이가 아직 뱃속에 있을 때, 나는 이런 말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험블이를 낳은 직후에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전까지는 제리와 함께 대전에 살고 있었다. 제리의 고향은 대전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던 동네에서는 거의 한 집 걸러 한 집이 반려견을 키우고 있었고, 산책을 나가면 동네 사람들을 만나서 친근하게 인사하는 것처럼 제리도 동네견들과 익숙하게 냄새를 주고받고 뛰어놀았다. 그중에는 제리와 합이 잘 맞는 애들도 있었고, 만나기만 하면 이빨을 드러내며 서로 싫어하는 애들도 있었다. 

내 마음속 대전이라는 도시는 반려견들의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한 블록 가면 공원이 나오고, 또 한 블록 가면 더 큰 공원이 나오고, 한 블록 가면 잔디가 깔린 넓은 공원이 나오는데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낮 시간에는 대부분이 공터였다. 그럼 우리는 제리를 데리고 넓은 잔디밭에서 공놀이도 하고 터그 놀이도 하고 그냥 무작정 뛰기도 했다. 잔디밭을 달리는 제리는 푸들이 아니라 흡사 야생마 같았고, 당시 왕좌의 게임에 심취해 있던 나는 제리가 도트라키 같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어느 날은 남편이 근육을 다쳐서 근육 주사를 맞으러 생소한 동네에 있는 병원을 가던 중이었는데, 그 병원 근처에 아주 넓은 공원에서 아니 글쎄, 온갖 종류의 반려견들이 우글우글 나와서 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도그쇼가 열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 공원이 넓다 보니 반려견 산책을 나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사람들이 한두 명씩 모이는 게 커지고 커져서 수십 명이 각자 반려견들을 데리고 나오는 바람에 거의 도그쇼와 같은 광경이 펼쳐진 것이었다. 나는 그때 티브이로만 보던 특이한 종들을 많이 구경했다. 그레이 하운드, 아프간하운드, 알래스카 말라뮤트, 올드 잉글리시 쉽독, 셔틀랜드 쉽독 등등. 알고 보니 주말마다 이 공원은 강아지 산책으로 유명한 공원이었다. 그 핫플레이스를 발견한 직후 우리는 주말마다 제리를 데리고 공원에 나와서 다른 강아지들과 같이 놀았다. 달리는 걸 좋아하는 제리는 푸들이랑 어울리지 않고 주제에 보더콜리나 이탈리아 그레이 하운드 급 애들하고만 놀았다. 아마도 이 시기가 제리의 견생에서 황금기였을 것이다. 


물론 이 공원만 이렇게 특별했던 건 아니었다. 우리 동네 바로 앞에 있는 공원에서도 숫자만 조금 적어졌을 뿐 매일 동네 주민들이 반려견을 데리고 나와서 운동도 하고 강아지 사회화도 시키고 서로 다른 강아지들과도 친해지는 일들이 일상이었다.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은 무언의 법칙처럼 운동장 한가운데로 모이고,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은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조깅을 하거나 각자의 운동을 했다. 그래서 매일 산책을 나가면 제리 왔구나, 촌이 왔구나, 해피 왔구나 하면서 서로 인사를 했고, 견주들은 육견 얘기를 하면서 여러 가지 정보도 교환하고 서로 가져온 간식도 나누곤 했다. 웃긴 일화 중에 하나는 어떤 아주머니께서 자신의 반려견을 잠깐 놔두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그 강아지는 자기 주인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다른 강아지랑 놀고 있었고, 주인 없는 강아지를 다른 견주들이 돌봐주고 있던 적도 있었다. 그 강아지는 주인이 화장실에서 돌아오면서 자기 이름을 불렀을 때에야 주인이 잠깐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알았다. 


제리가 다니던 동물병원은 차로 10분 정도 가면 나오는 곳에 있었는데, 대전은 출퇴근 시간만 제외하면 도시가 매우 한산했기에 우리는 밤에라도 제리 몸에 아주 좁쌀만 한 물혹이 나 있거나 눈이 충혈되어 있거나 하면 바로 제리를 데리고 동물병원으로 직행했다. 좀 찾아보면 아주 별거 아닌 거였을 텐데도 그때는 제리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 같으면 무조건 병원부터 갔다. 그리고 각종 영양제를 직구로 사서 먹이고 여름이 되면 황태와 야채와 닭가슴살로 보양식을 해 주었다. 냉동 닭가슴살을 10킬로씩 사서 냉동실에 꽉꽉 채워 넣고 우리가 먹은 적은 한 번도 없이 오롯이 다 제리의 몫이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제리는 대전에서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아무 걱정 없이 견생을 잘 누렸다. 3년 뒤에 자기 신세가 험블이에게 밀려 이렇게 찬밥 신세가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며칠 전이 제리의 6번째 생일이었는데 생일인 줄도 모르고 넘어갔다는 건 안 비밀... 오늘 시저 케이크 만들어줄게, 제리야!)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받는 애, 미움받는 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