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드 파리>, <웃는 남자>, <레 미제라블>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작품을 접하지는 못했더라도 제목은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보았을 대작들.
책으로, 뮤지컬로, 영화로 이 작품들은 오랜 세월 우리의 곁을 지키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대작들이 한 사람의 손에서 탄생하였다면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작가의 문학적 재능에 대한 찬사의 마음과 동시에, 이러한 작품을 그려내기까지 작가가 겪었을 삶의 질곡과 노력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당시에도, 10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을 뛰어넘은 지금에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작가.
시대의 문학을 대표하는 영광을 얻은 작가.
프랑스의 대 문호 '빅토르 위고'가 보여준 문학의 역사, 프랑스 민중의 역사 속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샤토브리앙을 꿈꾼 소년
"나는 샤토브리앙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
시와 글을 사랑하던 어느 열한 살 소년의 다짐이다.
당대 위대한 문학가이자 낭만주의 선구자로 알려졌던 샤토브리앙을 꿈꾼 이 소년.
이 소년은 자신의 작품이 오페라, 영화, 뮤지컬로 수많은 이들과 함께 살아 숨 쉬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세기가 바뀐 후에도 이렇게 사랑받고 있을지는 알지 못했겠지만, 빅토르 위고는 소년 시절 자신의 꿈을 이루고 문학가로서 명예로운 삶을 살아갔다.
문학성을 인정받아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고, 프랑스 작가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영예 중 하나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도 추대되었으니 말이다.
그의 80세 생일은 공휴일로 지정된 바 있으며, 위고가 세상을 떠나던 날 학교는 휴교를 하고 2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프랑스 문학인으로서 첫 국민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프랑스 문학을 이끈 거장에 대한 존경, 그리고 스타 작가에 대한 관심이 함께 한 시간이라 할 수 있으리라.
작가로서의 그를 대중들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의 작품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읽혀왔는지를 그의 마지막 시간을 통해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샤토브리앙을 꿈꾸던 소년은 그렇게 자신이 그리던 모습을 현실로 만들어냈다.
'꿈은 이루어진다'의 상징인 빅토르 위고.
그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간다면, <레 미제라블>의 뮤지컬 공연장에 앉아 흐뭇하게 무대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노트르담을 살려낸 펜의 힘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노트르담 성당.
어쩌면 노트르담이 우리의 곁에 없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크고 작은 혁명을 거치며 노트르담 대성당은 큰 손상을 입게 되고, 19세기 초에는 철거를 논의하기에 이른다.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노트르담을 구한 것은 바로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이를 지키기 위한 파리 시민들의 모금 운동이 시작된다.
이 모금을 통해 노트르담 대성당은 복원을 거쳐 수많은 세월을 그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다.
펜이 가진 힘, 하나의 글이 사람의 마음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위고, 민중을 노래하다
하루가 지나가면 또 하루 늙어갈 뿐. 이것이 가난한 자들의 삶.
주머니에는 1주일을 버틸 돈만 있어. 뼈 빠지게 일 안 하면 굶주릴 수밖에 없네.
우리는 예전에 자유를 위해 싸웠는데 지금은 빵을 위해 싸우네.
평등이란 대체 무엇인가, 죽으면 평등해지지. 기회를 잡아. 비바 프랑스!
- 영화 <레 미제라블> 가브로슈의 독백 -
<레 미제라블>에서 위고가 담아낸 것은 단순한 장 발장이 이야기를 넘어선다.
그는 이 작품에서 민중의 이야기, 그 당시 그가 보고 겪었던 민중의 땀과 눈물을 오롯이 담아낸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정치인 위고'로서의 정체성 또한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1948년 2월, 상공인들로 대표되는 시민 계층과 노동자들은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며 혁명을 벌이게 되고, 이로 인해 프랑스 왕정은 공화정으로의 변화를 맞게 된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위고는 국회의원으로 정치 행보를 시작하고, 이것이 그를 시민들에게 더욱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유럽은 한 민족이며 한 가족이다. 유럽 합중국이 되자”
“유럽대륙의 돈은 한 가지여야 한다”
상당히 선구안적인 주장을 한 정치인 위고의 이력을 살펴보면 정치적인 혜안 또한 뛰어났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겠다.
이러한 위고의 삶에도 큰 위기가 닥쳐오는데..
공화정을 수립하여 대통령이 된 루이 나폴레옹이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 위한 이른바 '친위 쿠데타'를 벌인 것이다.
다시 시작된 왕정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낸 위고는 망명 생활을 하게 되고, 망명 생활 중 <레 미제라블>과 <웃는 남자>라는 대작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열혈 왕당파였던 위고는 공화당으로 노선을 변경하면서 비난을 당하기도 했다.
마치 <레 미제라블>에서 왕당파에서 공화파로 변화한 '마리우스'처럼 말이다.
어째서 그는 이러한 비난, 그리고 망명이라는 고달픈 시간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치적 견해를 바꾼 것일까?
그 답은 언제나 '민중', 그리고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희망 없는 민중들의 삶, 이른바 '불쌍하고 비참한 자들'인 '레 미제라블'의 삶을 지켜보며 위고는 그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 그들을 위한 글을 쓸 것을 다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의 글을 통해 19세기, 자유를 외치고 인간다운 삶을 찾고자 기꺼이 쓰러져갔던 수많은 민중들의 모습.
그들의 마음과 그 시간의 이루어낸 것들의 가치가 세월의 무게를 더해 전해오고 있음을 지금의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민중을 사랑하고, 민중에게 사랑받은 작가.
빅토르 위고의 삶은 진정한 '국민 작가'의 삶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가장 유명하고 가장 대중적인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기상천외한 인물이었다.
장수하며 방대한 문학 작품을 써낸 작가이자 재능 넘치는 데생 화가이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정치인이자 만족할 줄 모르는 만인의 연인으로 ‘세기의 전설’이었다.
그의 삶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역사학자 델핀 뒤샤르가 남긴 위고에 대한 평은 어쩌면 위고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문장이 아닐까.
유명하고 대중적이며, 기상천외했던 인물.
세기의 전설이자 역사의 소용돌이와 함께 한 작가.
빅토르 위고의 펜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수많은 민중들과 함께.